[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상상, 2014, 300-336쪽. ]
1. 『대학』이나 『중용』은 논 2-3마지기
2. 값비싼 구리와 요구되는 노동력
3. 종잇값은 왜 비쌌을까?
4. 누가 종이를 만들었을까?
1. 『대학』이나 『중용』은 논 2-3마지기
[301-304쪽]
- 어득강의 말: “외방의 유생 중에는 비록 학문에 뜻이 있지만 서책이 없어 독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궁핍한 사람은 책값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하고, 값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상면포 서너 필은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중종실록』 24년 5월 25일)
• 조선시대 서적은 대개 한 면이 10행이고 1행은 20자이므로 오늘날 200자 원고지 1장 분량에 해당.
• 『대학』은 178면, 『중용』은 294면.
• 오늘날 안동포 한 필에 60-70만 원 정도 함.
- 선조 9년(1576)의 자료인 유희춘의 『미암일기초』. “내가 교정한 『주자대전』, 『주자어류』는 모두 교정이 잘 되어 사림이 이전 판본과는 아주 다르다며 다투어 애지중지하였다. 외방의 수령 중에 자제를 위해 사려고 하는 사람이 오승목 한 동을 값으로 치르고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 1동(同)은 면포 50필
• 1동이 『주자대전』 값인지, 『주자어류』 값인지, 둘 다의 값인지는 확실하지 않음.
[304-305쪽]
- 상면포는 삼승포(三升布)를 말함. 보통 품질의 무명
- 오승목(五升木)은 고급 품질의 무명
- 『대전속록』에 의하면, 풍년과 흉년을 막론하고 면포 1필을 쌀 7두(斗)로 환산함.
• 3-4필은 쌀 21말에서 28말 가격에 해당함.
• 20세기에 보통 1마지기 논에서 산출되는 쌀이 대개 한 섬(10두)
• 농업기술의 진보를 따지지 않더라도 『대학』이나 『중용』은 논 두세 마지기의 소출에 해당함.
- 1511년 천재지변 이전의 면포 시세는 대개 3두
• 3두를 기준으로 하면 3-4필은 9-12두이므로 논 한 마지기의 1년 산출량
- 머슴을 고용했던 일제시대 경상남도 일대에서 1년치 품삯이 쌀 한 가마니
- 오승목은 조선 후기 국가에서 징수하던 군포 기준으로 너비 7치, 길이 35척
• 양란이 끝나고 정부는 양인들로부터 군역을 지지 않는 대신 1년에 군포 두 필을 징수했는데, 이는 너무 가혹한 조치여서 사회문제가 됨.
• 1750년 균역청을 설치하고 두 필을 한 필로 줄였지만 여전히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 50필은 1750년 이전 기준으로 양민 25명이 1년 동안 내야 하는 군포의 양이고, 1750년 이후 기준으로 양민 50명이 1년 동안 내야 하는 군포의 양.
[305-309쪽]
- 명종 9년(1544) 어숙권은 『고사촬요』를 엮음.
• 사대교린에 관한 간단한 지식과 일상생활의 상식을 내용으로 함.
- 『고사촬요』에 「서책시준」이라 하여 당시 서적 가격을 기록해놓음.
• 책의 정가는 아니고 책을 찍는 데 필요한 비용을 밝힌 것.
• ‘시준’은 시가를 말함.
- 팔리는 책의 종류는 성리학 서적으로 조선 지식인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 표는 서명, 종이, 면포, 쌀 등으로 짜여있음.
- 종이, 면포, 쌀 간의 상관관계는?
• ‘종이’ 항목은 책을 찍는 데 필요한 종이의 양
• 면포와 쌀은 종이의 값인가?
• 『서하집』은 종이 7첩에 면포 0.5필이고 『역대병요』는 종이 60첩에 면포 3필
- 띠라서 위의 표의 면포와 쌀은 종이 값이 아니며, 면포와 쌀의 양은 책을 인쇄하는 비용인 인쇄품값을 가리키는 것.
[309-310쪽]
- 「서책시준」은 명종 6년 서점 개설 논의 이후 3년 뒤에 작성된 것.
- 「서책시준」에 적힌 사항은 서적보급을 위해 종이를 가져오면 교서관에 소장된 목판으로 간행해주겠다는 정책적 산물로 추정됨.
• 종이를 마련해오면 관에서 인쇄비용을 받고 인쇄해준 것으로 보임.
•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책값은 비쌌음.
2. 값비싼 구리와 요구되는 노동력
[311-313쪽]
- 조선시대 인쇄의 주류는 목판인쇄와 금속활자인쇄이고, 그 중 대종을 이룬 것은 목판인쇄
- 「서책시준」에 올랐던 책들도 목판인쇄
- 목판본 제작에 어느 정도 비용이 들었을지에 대한 조선 전기의 자료는 없으니, 우회적인 길을 알아볼 수 있음.
- 성재 허전의 『성재집』 간행비용
• 『성재집』은 1891년 박치복이 주축이 되어 33권 17책으로 간행한 것
• 간행을 위해 모은 돈은 1만 578냥 4돈 7푼이고, 실제 사용한 돈을 8554.47냥.
• 실제 사용한 돈 중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등 건물 몇 채 짓는 데 2103.06냥이 들었고, 책 간행에 들어간 비용은 6451.41냥
- 6551.41냥의 세목
- 조선시대 출판에서 조판비와 종이값과 인쇄비가 대부분을 차지함.
• 조선시대 목판인쇄술에 결정적 변화가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전체적 비용 구성은 비슷할 것으로 추측됨.
• 목판본 인쇄에서 비용의 대부분은 목판 제작 품삯과 종이값이 차지함.
- 『성재집』은 208개 문중과 24개 고을, 수십 명의 개인이 출연하여 조성한 것.
• 한 가문에서 이를 찍으려고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
[313-314쪽]
- 목판은 무제한적 인쇄가 불가능함.
• 목판인쇄는 일정한 수요 이상 인쇄하면 글자가 이지러지고 나무의 결이 드러나는 등 인쇄결과가 나빠짐.
• 수요가 많은 서적은 목판을 다시 제작해야 함.
• 목판인쇄는 저렴한 인쇄방식이 아님.
- 금속활자를 사용하면 책값이 훨씬 낮아지는 것이 맞지만, 조선의 금속활자 사용은 책값을 떨어뜨리지 못함.
•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이후 50년 동안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전파됨.
• 조선의 금속활자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국가가 독점함.
• 왜 조선의 금속활자는 민간에 보급되지 못했는가?
- 독서층이 박약해서 서적의 대량 발행이 불가능해 책값이 높게 형성되었다는 분석
• 그 반대도 가능함. 책값이 너무 높아서 독서인구 형성이 저해되었을 수도 있음.
[314-316쪽]
- 서적인쇄에 필요한 물자는 활자, 목판, 종이, 잉크(먹)이고, 여기에 노동력이 투입되어 책이 완성됨.
• 목판은 나무라서 조달하기 비교적 쉬움.
• 먹도 나무를 태워 만드는 것이라서 구하기 쉬움.
• 문제는 활자와 종이
- 조선조 금속활자는 동활자
• 철활자가 있기는 있었으나 녹이 슬어 대부분은 동활자
•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는 10만 자에서 20만 자가 주조되었으며, 태종 3년 주자소 설립부터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11차례 주조됨. 대개는 새로 주조함.
- 조선조의 활자는 크기가 큰 편
• 오늘날 책은 한 면당 200자 원고지 다섯 쪽을 담지만, 조선조 책들은 한 면당 200자 원고지 한 장 정도로 조판됨.
• 활자 크기가 엄청나게 큰 데다 이를 15만 자 주조하려면 상당량의 구리가 필요함.
- 조선시대에 구리를 얻는 방법
• 방법(1): 구리그릇 등 기존 구리를 녹여서 사용하는 것
• 방법(2): 광산에서 구리를 캐내어 정련하는 것
• 방법(3): 일본에서 사들이는 것
- 세종 5년에 동전 주조를 결정한 직후 구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남
• 당의 개원통보를 본떠 조선통보를 주조함.
• 동전을 주조하는 화로는 30개였고 하루에 소요되는 구리의 양은 135근(세종 6년 1월 18일)
• 1개월에 4050근, 1년에는 4만 8060근에 달했는데 그 시점에 보유한 구리는 4011근
■ 금속활자가 국가의 독점물이 된 이유(1): 구리 부족 [317-319쪽]
-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 각 관청은 물론 전・현직 관리들에게 품계에 따라 구리를 배분하여 바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
• 이것으로 늘어나는 구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음.
- 구리 광산을 개발하려는 노력
•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에 구리 광산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림.
• 그러나 구리 광산 개발은 실패함. 투입 노동력에 비해 산출량이 너무 적었음.
- 동전은 유통되지 않았고 주전사업도 실패함.
• 이후 구리는 “우리나라에 나지 않는 것”(『세종실록』 27년 6월 15일, 세종의 말)으로 여김.
• 구리 광산을 정부가 독점하며 개인의 광산 개발을 금함.
• 국내 구리 광산은 18세기 중엽까지 거의 개발되지 못함.
• 부족한 구리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충당함. 대금은 면주와 정포와 면포.
■ 금속활자가 국가의 독점물이 된 이유(2): 한자 [319쪽]
- 라틴 자모는 스물 몇 개의 활자만으로 모든 책을 찍어낼 수 있음.
- 한자는 10만 자 이상임.
• 서책을 제대로 인쇄하려면 막대한 양의 활자가 필요함.
• 구리를 쉽게 구할 수 있더라도 많은 활자를 제작하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함.
• 그렇게 만든 활자로 책은 인쇄하는 데도 노동력이 많이 필요함.
3. 종잇값은 왜 비쌌을까?
[321-322쪽]
- 조선 전기 종이값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서 계량적 접근은 불가능함.
- 종이값이 고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료
- 자료(1): 면주 세 필로 표전지 열두 장을 구매함.(『세종실록』 29년 윤4월 7일)
• 면주는 명주로 염색하지 않은 흰 비단을 말함.
- 자료(2): 연대 불명의 자료 (이겸노, 『문방사우』, 대원사, 1989, 27면)
• 벼는 도정하지 않은 것이고, 쌀은 도정한 것.
- 자료(3): 1570년 6월 유희춘의 자료
• 유희춘은 선상목 한 필 또는 오승목 한 필로 백지 여섯 권을 구입함.
• 면포 한 필당 종이 120장
[322-326쪽]
- 종이값은 왜 비쌌는가?
- 종이의 여러 용도
• 국가와 왕실에서 쓰는 각종 문서 등.
• 중국에 올리는 문서와 공물
• 과거시험 답안지
• 장례
• 갑옷 제작
- 종이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용도에 따라 종이 질을 규정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 닥나무의 품귀로 두꺼운 종이의 제조를 제한하고 다른 재료를 쓰는 잡초지를 사용하기로 함.
• 잡초지는 품질이 나빠서 닥지가 계속 사용됨.
• 묵은 종이를 재활용하는 환지를 사용하도록 했지만 품질이 나빠 사용이 중지됨.
- 종이 부족에는 종이 생산량을 늘리기 어려웠다는 측면도 있음.
- 종이의 기본 원료는 닥
- 『경국대전』 「공전」 ‘재식’에 의하면, 닥나무에 대하여 공조와 해당 도・고을에서 장적을 작성하여 국가의 관리대상으로 삼음.
• 닥의 확보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이고, 이는 닥이 늘 부족한 상황을 반영함.
- 닥을 심고 가공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줌.
• “대소의 민가에 닥나무밭이 있는 경우는 백에 하나둘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경우도 소재지 관청에 빼앗겨 이익이 자신에게 미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베어버리는 자가 있으니 한탄할 일입니다.”(『태종실록』 10년 10월 29일 기사)
• 닥은 공물이었고 정부에 대가 없이 바치는 것이었음.
• 닥나무가 있어도 이익은 없이 해만 있어서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베어버리기도 함.
4. 누가 종이를 만들었을까?
[327-331쪽]
- 종이 제조처는 중앙과 지방으로 나뉨.
• 서울에서 종이를 제조하는 곳은 장의사동의 조지서
-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서책인쇄에 사용된 종이는 지방에서 상납한 것.
[331-332쪽]
- 지방에서 종이 제조를 담당한 사람은 지장(紙匠)
• 『경국대전』에 나오는 지방 외공장의 지장은, 충청 131명, 경상 265명, 전라 237명, 강원 33명, 황해 39명, 도합 705명.
• 지장은 관아에 소속됨.
- 지방 사찰과 농민도 종이 생산의 주체
[332-336쪽]
- 종이 제조는 엄청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강제노동
• “종이를 만드는 어려움은 다른 노동보다 심하다.”(『명종실록』 12년 5월 7일, 단양군수 황준량의 보고)
• “각 도에서 만드는 책지는 비록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만들어 바치게 합니다. 하지만 각 도에서 그 수를 채워 바치기가 쉽지 않아 농민들을 모아 계속 부리므로 농사에 방해가 되고 생업을 걷어치우는 탄식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정지하게 하소서.”(『세종실록』 28년 4월 30일 기사)
- 종이를 수요만큼 생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음
• 선조 6년(1573) 교서관에서 『발명강목』 200질을 인쇄하려고 했으나 필요한 종이량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부담시키면 전에 없는 폐단이 일어난다고 하여 100질로 줄여 인쇄함.(『미암일기초』 4, 37면: 계유년(1573) 7월 16일)
• 종이 제조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무료라는 점은 종이 생산을 오히려 제한했고 종이값을 올라갈 수밖에 없었음.
(2021.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