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4

나는 왜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두 번 읽었나?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는 정말 재미없는 책이다. 사전과 비슷한 책이라서 재미난 부분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나는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칸트 직전까지만 두 번 읽었다. 나는 왜 그렇게 했는가?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나는 철학과를 다녔지만 학부를 졸업할 때가 다 되도록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내가 다닌 철학과에서는 대부분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토론에 미친 사람들처럼 토론이나 하거나, 학생들한테 발표나 시키거나, 뭔가를 가르치려고는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못 가르치거나, 셋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은 가야 했다. 당시 나는 진중권을 보며 이상한 놈들을 약 올리며 돈 버는 삶을 동경했고, 그러려면 일단 그럴듯한 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중권은 석사니까 내가 박사학위를 받으면 이기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학위를 받을 수 있는가? 일단 경제학은 아니었다. 경제학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멍청해서 경제학을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경제학을 복수전공하면서 경제학과 경제학 전공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마도 저기는 뭔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인상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인문대에서 이상한 거나 배워놓고 사회과학적인 지식 없이 사회 타령하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내가 다닌 철학과에서는 서양철학만 가르쳐서 동양철학을 복수전공했다. 동양철학에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A나 A+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어떤 교수가 대학원 진학을 슬쩍 언급하기도 했지만, 당시 그 과 교수들 중 태반이 정신 나간 소리를 일삼는 사람들이라서 차마 갈 수 없었다. 심지어 공자가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한국인이니까 공자는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교수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교수는 정념퇴임 이후 『환단고기』는 역사서이며 그 동안 자기가 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히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개새끼라도 해도, 적어도 사료 먹는 개 밑으로는 들어가야지 똥 먹는 개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철학과는 허술했지만 그 정도로 망하지는 않아서 철학 학위가 내 명예를 손상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다닌 철학과의 상태를 감안할 때 좋은 학교 철학과라도 해도 대충 비비면 어떻게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좋은 학교 철학과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ㅅ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제가 대학원을 가려고 합니다. 선생님 추천서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선생님께서 추천하실 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군대를 갈 건데 그 사이에 선생님이 저를 잊으실까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니?”

제대하고 ㅅ선생님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추천서를 받으면 좋을 텐데, 아직도 추천받을 것이 없습니다만...”, “추천서는 어디에 쓰려고?”, “대학원을 가려구요.”, “어차피 대학원은 미달이니까 원서만 쓰면 되는데 왜?”, “다른 학교 대학원 가려구요.” 선생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〇〇군, 대학원 가지마. 하나도 안 좋아. 교수들 보면 좋아 보이지? 그거 겉보기만 좋아 보이지 하나도 안 좋아. 대학원 가지마.” 나는 교수되겠다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학문에 뜻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던 모양이다. 사실, 그러기는 했다.

추천받을 것도 없으면서 추천서를 받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추천서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본 다음,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그 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나서 추천서를 받을 생각이었다. 당시 철학과에서 학문적으로 믿을 만한 거의 유일한 선생님이 ㅅ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 선생님을 찾아갔던 것이다. ㅅ선생님의 추천서 정도는 되어야 추천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 말을 그렇게 끊어버려서, 나는 선생님을 찾아간 취지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철학과 대학원 입학에는 추천서가 필요 없었는데, 내 친구가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ㅅ선생님은 대학원을 안 가겠다는 내 친구에게는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그 선생님이 참-교육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때마다 ㅅ선생님께 문자로나마 안부 인사를 하고 있다.)

ㅅ선생님도 대학원 진학을 만류한 상황에서 마땅히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진학할 대학원의 학부 수업을 들어보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다른 학교 수업을 듣는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학부 수준의 철학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영상 강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주변에 대학원 이야기를 해도 “우리 학교 대학원 미달인데 그냥 들어오면 되지 왜?”라는 대답만 들었다. 그러다 강유원 박사의 강의 파일을 듣게 되었다.

강유원 박사의 강의 중 철학과 관련된 것은 비교적 적었고 상당 부분은 역사나 문학 관련된 것이었는데, 어쨌든 재미있어서 강의 파일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는 철학 공부 방법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강유원 박사가 쓴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강유원 박사는 석사과정에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철학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었다.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쯤 읽으면 될 걸세.” 강유원 박사는 석사과정 첫 학기에 한 학기 내내 다른 공부는 안 하고 정말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었고, 그러자 뭔가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강유원 박사 강의 파일에는 책에 나오지 않는 뒷이야기가 나온다. 강유원 박사는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은 뒤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시킨 대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도교수가 잘 했다고 칭찬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인데, 지도교수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강유원 박사의 일화를 듣고 ‘철학사를 읽으면 웬만큼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입학시험 기출문제를 보고서야 신 존재 증명이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내가 학부 4년 동안 다니면서 수업에 결석도 거의 안 했는데도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 정도로 기초 상식도 없는 상황이니 철학사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유원 박사처럼 50번 읽을 수는 없으니 내용을 대강 파악할 정도로만 읽기로 했다. 그렇게 탈레스부터 칸트 이전까지 두 번 읽고 요약했다. 정말 괴로웠다.

칸트 이후 부분을 안 읽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칸트부터 독일 관념론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입학시험에 거의 안 나오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시험에 낸다는 것은 석사과정에 입학하지 말라는 것이거나 어디서 석사학위 받고 오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어차피 분석철학 부분은 힐쉬베르거 책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론, 심리철학, 형이상학, 언어철학, 윤리학 등의 개설서를 따로 읽고 정리했다. 해당 과목 선생님께 미리 연락드리고 청강하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미친 놈처럼 이해도 못하면서 혼자 책 붙들고 그런 짓을 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철학 개론 수준의 서적을 읽을 것이라면 레러・콘맨・파패스의 『철학의 문제와 논증』을 읽었어야 했다. 그 책이 내용도 좋고 읽기도 쉬울 뿐 아니라 철학사에 등장하는 주요 논증들을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철학적 기초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을 대학원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나에게 그런 책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나?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학부 때 다녔던 학교의 중앙도서관에도 『철학의 문제와 논증』이 멀쩡히 있었다. 왜 나는 학부 때 알았어야 하는 책을 대학원 와서야 알게 되었는가? 아마도 학부 때는 철학에서 논증이 중요하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책의 표지를 보았다고 해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어서, 나에게 대학원 입학 등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만큼 최대한 알려준다. 대학원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몇 명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최대한 알려주려고 했다.

(2020.02.04.)


2020/04/03

[고교 수학] 곱셈 공식


(1-1) (𝑥+𝑦)² = 𝑥²+2𝑥𝑦+𝑦²

(1-2) (𝑥-𝑦)² = 𝑥²-2𝑥𝑦+𝑦²

(2) (𝑥+𝑦)(𝑥-𝑦) = 𝑥²-𝑦²

(3) (𝑥+𝑎)(𝑥+𝑏) = 𝑥²+(𝑎+𝑏)𝑥+𝑎𝑏

(4) (𝑎𝑥+𝑏)(𝑐𝑥+𝑑) = 𝑎𝑐𝑥²+(𝑎𝑑+𝑏𝑐)𝑥+𝑏𝑑

(5) (𝑥+𝑦+𝑧) = 𝑥²+𝑦²+𝑧²+2𝑥𝑦+2𝑦𝑧+2𝑧𝑥

(6-1) (𝑥+𝑦)³ = 𝑥³+3𝑥²𝑦+3𝑥𝑦²+𝑦³

(6-2) (𝑥-𝑦)³ = 𝑥³-3𝑥²𝑦+3𝑥𝑦²-𝑦³

(7-1) (𝑥+𝑦)(𝑥²-𝑥𝑦+𝑦²) = 𝑥³+𝑦³

(7-2) (𝑥-𝑦)(𝑥²+𝑥𝑦+𝑦²) = 𝑥³-𝑦³



(2020.06.11.)


2020/04/02

경제학자 어빙 피셔의 불운



피터 갓프리스미스는 『이론과 실재』(Theory and Reality)에서 쿤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X등급인 10장(Chapter X)은 쿤의 위대한 책에서 가장 안 좋은 부분이다. [...] 쿤이 10장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p. 96) 그런데 경제학자 중에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 바로 어빙 피셔(Irving Fisher)다. <거시경제학>과 <화폐금융론> 교과서에 나오는 그 어핑 피셔다.

1905년 뉴욕 그랜드센트럴 역에 도착한 피셔는, 누군가와 통화하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피셔는 부스 문을 닫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다리 사이에 놓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뒤 피셔의 가방은 사라졌다. 피셔가 입은 정장만큼이나 서류가방도 고급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가방이 아니었다. 그 가방에는 거의 완성한 원고가 있었다.

경제학과를 다니다 형편이 어려워 나쁜 길로 빠진 가방 도둑이 피셔의 원고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뉘우치며 원고를 돌려주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영화나 소설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다. 결국 피셔의 원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피셔는 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 장(chapter)을 완성할 때마다 복사본을 만들었다. 그렇게 1년 만인 1906년 책을 다시 완성하여 출판했다. 『자본과 소득의 본성』(The Nature of Capital and Income)은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사실, 어빙 피셔의 불운은 한두 차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학 진학 직전인 1884년에 피셔의 아버지가 갑자기 결핵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피셔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다. 1898년에는 교수로 임용되자마자 결핵에 걸려 몇 년 간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다. 겨우 건강을 되찾아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1904년 예일대 북쪽에 있던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그리고 1년 뒤인 1905년 원고를 도둑맞았다.

불운을 극복할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피셔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운을 이겨낼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피셔는 예일대에서 학부를 다닐 때 장학금과 과외 교습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1888년에 정상적으로 졸업했다.

피셔의 학부 전공은 수학이었지만 사회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당시 저명한 사회학자인 윌리엄 섬너(William G. Sumner)의 사회학 과목을 다섯 과목이나 들었다. 사회다윈주의자인 섬너는 사회를 유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모든 이해관계가 정립되어 사회가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작용-반작용을 거듭하며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신-고전주의 경제 이론의 수학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던 섬너는 수학교수에게 과외 교습을 받았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고 한다. 1888년 가을, 섬너는 수학과 졸업과제를 제출하려고 학교에 온 피셔에게 수리경제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고, 피셔는 경제학자가 되기로 했다. 피셔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균형 이론을 정교화했는데 이 때 ‘이상적 시장 모형’이라고 이름 붙인 모형을 개발했다. 그렇게 사무엘슨이 경제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박사 논문이라고 평한 논문이 나오게 되었다. 수학과 경제학을 같이 공부한 피셔는 동시대 경제학자들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1893년 박사 학위 받은 피셔는 곧바로 결혼했다. 피셔의 고향은 로드아일랜드인데, 장인은 로드아일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였다. 부유한 장인은 1년 간 딸과 사위를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보내고 그 사이에 예일대 북쪽에 딸과 사위가 살 저택을 지었다. 피셔는 1년 간 유럽을 여행하면서 신-고전파 경제학 창시자들을 두루 만나고 파리에서 푸앵카레의 확률 이론 수업도 들었다. 1898년에 결핵에 걸려 6년 간 휴양해야 했지만, 건강을 회복한 뒤 위생학 교과서를 공동 집필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1920년대가 되자 피셔의 모든 일이 잘 풀렸고 불운은 끝난 듯 보였다. 피셔의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는 적었지만, 피셔를 존중하는 경제학자들은 많았다. 학문적 성공 뿐만 아니라 여러 대외 활동도 활발히 했다. 피셔는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펼쳤고, 언론에서는 피셔를 경제/정치/보건 전문가로 소개했다.

피셔는 재정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피셔는 자기가 연구한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색인카드를 고안했고, 1913년에는 색인카드를 제작-판매할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1925년에 카덱스랜드에 매각하면서 피셔는 카덱스랜드의 주식과 일정 가격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카덱스랜드의 이사로 취임한 피셔는 돈을 빌려서 카덱스랜드의 주식을 더 샀고 이 투자는 크게 성공했다. 수십 년 간 처가에 기대어 살던 피셔가 드디어 집에 돈을 벌어다주는 사위가 되었다. 당시 피셔의 순 자산이 1천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2008년 달러 가치 기준으로 1억 2800만 달러가 된다. 피셔는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전쟁, 질병, 사회퇴폐, 통화불안을 예방하는 재단을 설립하려고 했다.

호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호황이 계속될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저 뱁슨과 윌리엄 해밀튼은 1926년에 약세장을 전망했다. 1926년은 강세장이었다. 해밀튼은 1927년과 1928년 강세장 전망으로 돌아섰지만 뱁슨은 계속 약세장 전망했다. 3년 간 계속 주가가 상승해서 뱁슨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피셔도 상승장이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1928년 12월 <뉴욕헤럴드트리뷴> 일요판에는 피셔의 증시 전망이 실렸다. 피셔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판단이 거래자들의 집단 지성을 능가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 [...] 투자 종목이 적을수록 위험하고 투자 종목이 많을수록 안전하다. 충분히 다양하게 분산투자하면 안전하게 수익을 낼 수 있다.” 분산과 리스크의 관계를 공식으로 설명한 사람은 피셔가 처음이었다.

1929년 9월, 뱁슨은 자기가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조만간 시장이 붕괴할 것이며 그 규모가 심각할 수 있으니 지금은 빚을 갚고 투자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했다. 같은 날 피셔는 ‘증시가 침체될 수는 있지만 폭락할 가능성은 없다’는 내용의 반박문을 <뉴욕타임스>에 보냈다. 10월 15일 피셔는 뉴욕 구매업자협회 모임에서 “주가는 영원히 하락하지 않을 고지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주 뒤,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조정장일 뿐이라고 믿은 피셔는 1929년 12월에도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이 시점에도 다우지수는 1928년 2월 수준이다. 현재 주가는 1923년에 돌파한 고점보다도 더 위에 있다. 시장이 최악의 공포에 빠진 때도 이 저점이 깨진 적은 없다.” 그러나 1930년과 1931년에 이어진 사상 최악의 약세장에서 저점이 뚫렸다.

피셔는 분산 투자를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래밍턴랜드와 몇몇 회사에 집중 투자했다. 게다가 래밍턴랜드의 주가가 58달러에서 1달러가 될 때까지 팔지 않았다. 처제에게 돈을 빌려 파산을 겨우 면했지만 1930년과 1931년에 계속 주가가 하락해서 처제도 타격을 입었다. 결국 예일대 북쪽에 있던 자택도 자기와 부인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조건으로 예일대에 팔 수밖에 없었다.

로저 뱁슨은 재산 손실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공황을 예측한 인물로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이후에 혁명이니 핵공격이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외면 받았다. 피셔는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거의 전 재산을 잃어 비웃음을 받았지만, 1930년대부터 경제와 금융 시장을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피셔의 접근법이 다시 서서히 지지받기 시작했고, 이후 피셔의 업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불운은 개인의 재산이나 건강이나 명성을 앗아갈 수는 있지만 연구 업적의 생명력까지 앗아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피셔의 생애는 보여준다.

* 참고 문헌

저스틴 폭스,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 윤태경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0).

* 뱀발: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의 원제는 <The Myth of the Rational Market>이다. “합리적 시장이라는 신화” 정도로 책 제목을 번역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책 제목을 굳이 그렇게 번역한 데는, 아마도 출판사가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와 달리,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에서 소개한 경제학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살아 있다.

(20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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