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는 정말 재미없는 책이다. 사전과 비슷한 책이라서 재미난 부분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나는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칸트 직전까지만 두 번 읽었다. 나는 왜 그렇게 했는가?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나는 철학과를 다녔지만 학부를 졸업할 때가 다 되도록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내가 다닌 철학과에서는 대부분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토론에 미친 사람들처럼 토론이나 하거나, 학생들한테 발표나 시키거나, 뭔가를 가르치려고는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못 가르치거나, 셋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은 가야 했다. 당시 나는 진중권을 보며 이상한 놈들을 약 올리며 돈 버는 삶을 동경했고, 그러려면 일단 그럴듯한 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중권은 석사니까 내가 박사학위를 받으면 이기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학위를 받을 수 있는가? 일단 경제학은 아니었다. 경제학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멍청해서 경제학을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경제학을 복수전공하면서 경제학과 경제학 전공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마도 저기는 뭔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인상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인문대에서 이상한 거나 배워놓고 사회과학적인 지식 없이 사회 타령하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내가 다닌 철학과에서는 서양철학만 가르쳐서 동양철학을 복수전공했다. 동양철학에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A나 A+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어떤 교수가 대학원 진학을 슬쩍 언급하기도 했지만, 당시 그 과 교수들 중 태반이 정신 나간 소리를 일삼는 사람들이라서 차마 갈 수 없었다. 심지어 공자가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한국인이니까 공자는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교수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교수는 정념퇴임 이후 『환단고기』는 역사서이며 그 동안 자기가 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히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개새끼라도 해도, 적어도 사료 먹는 개 밑으로는 들어가야지 똥 먹는 개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철학과는 허술했지만 그 정도로 망하지는 않아서 철학 학위가 내 명예를 손상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다닌 철학과의 상태를 감안할 때 좋은 학교 철학과라도 해도 대충 비비면 어떻게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좋은 학교 철학과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ㅅ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제가 대학원을 가려고 합니다. 선생님 추천서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선생님께서 추천하실 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군대를 갈 건데 그 사이에 선생님이 저를 잊으실까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니?”
제대하고 ㅅ선생님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추천서를 받으면 좋을 텐데, 아직도 추천받을 것이 없습니다만...”, “추천서는 어디에 쓰려고?”, “대학원을 가려구요.”, “어차피 대학원은 미달이니까 원서만 쓰면 되는데 왜?”, “다른 학교 대학원 가려구요.” 선생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〇〇군, 대학원 가지마. 하나도 안 좋아. 교수들 보면 좋아 보이지? 그거 겉보기만 좋아 보이지 하나도 안 좋아. 대학원 가지마.” 나는 교수되겠다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학문에 뜻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던 모양이다. 사실, 그러기는 했다.
추천받을 것도 없으면서 추천서를 받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추천서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본 다음,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그 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나서 추천서를 받을 생각이었다. 당시 철학과에서 학문적으로 믿을 만한 거의 유일한 선생님이 ㅅ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 선생님을 찾아갔던 것이다. ㅅ선생님의 추천서 정도는 되어야 추천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 말을 그렇게 끊어버려서, 나는 선생님을 찾아간 취지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철학과 대학원 입학에는 추천서가 필요 없었는데, 내 친구가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ㅅ선생님은 대학원을 안 가겠다는 내 친구에게는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그 선생님이 참-교육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때마다 ㅅ선생님께 문자로나마 안부 인사를 하고 있다.)
ㅅ선생님도 대학원 진학을 만류한 상황에서 마땅히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진학할 대학원의 학부 수업을 들어보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다른 학교 수업을 듣는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학부 수준의 철학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영상 강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주변에 대학원 이야기를 해도 “우리 학교 대학원 미달인데 그냥 들어오면 되지 왜?”라는 대답만 들었다. 그러다 강유원 박사의 강의 파일을 듣게 되었다.
강유원 박사의 강의 중 철학과 관련된 것은 비교적 적었고 상당 부분은 역사나 문학 관련된 것이었는데, 어쨌든 재미있어서 강의 파일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는 철학 공부 방법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강유원 박사가 쓴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강유원 박사는 석사과정에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철학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었다.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쯤 읽으면 될 걸세.” 강유원 박사는 석사과정 첫 학기에 한 학기 내내 다른 공부는 안 하고 정말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었고, 그러자 뭔가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강유원 박사 강의 파일에는 책에 나오지 않는 뒷이야기가 나온다. 강유원 박사는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은 뒤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시킨 대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도교수가 잘 했다고 칭찬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인데, 지도교수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강유원 박사의 일화를 듣고 ‘철학사를 읽으면 웬만큼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입학시험 기출문제를 보고서야 신 존재 증명이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내가 학부 4년 동안 다니면서 수업에 결석도 거의 안 했는데도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 정도로 기초 상식도 없는 상황이니 철학사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유원 박사처럼 50번 읽을 수는 없으니 내용을 대강 파악할 정도로만 읽기로 했다. 그렇게 탈레스부터 칸트 이전까지 두 번 읽고 요약했다. 정말 괴로웠다.
칸트 이후 부분을 안 읽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칸트부터 독일 관념론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입학시험에 거의 안 나오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시험에 낸다는 것은 석사과정에 입학하지 말라는 것이거나 어디서 석사학위 받고 오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어차피 분석철학 부분은 힐쉬베르거 책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론, 심리철학, 형이상학, 언어철학, 윤리학 등의 개설서를 따로 읽고 정리했다. 해당 과목 선생님께 미리 연락드리고 청강하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미친 놈처럼 이해도 못하면서 혼자 책 붙들고 그런 짓을 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철학 개론 수준의 서적을 읽을 것이라면 레러・콘맨・파패스의 『철학의 문제와 논증』을 읽었어야 했다. 그 책이 내용도 좋고 읽기도 쉬울 뿐 아니라 철학사에 등장하는 주요 논증들을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철학적 기초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을 대학원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나에게 그런 책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나?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학부 때 다녔던 학교의 중앙도서관에도 『철학의 문제와 논증』이 멀쩡히 있었다. 왜 나는 학부 때 알았어야 하는 책을 대학원 와서야 알게 되었는가? 아마도 학부 때는 철학에서 논증이 중요하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책의 표지를 보았다고 해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어서, 나에게 대학원 입학 등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만큼 최대한 알려준다. 대학원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몇 명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최대한 알려주려고 했다.
(202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