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30

[인지과학의 철학] Miyazono (2017), “Does functionalism entail extended mind?” 요약 정리 (미완성)

    

[ Kengo Miyazono (2017), “Does functionalism entail extended mind?”, Synthese 194, pp. 3523-3541. ]

1 Introduction

2 CC functionalism

3 Absurd extended beliefs

3.1 Sprevak’s argument

3.2 The SR to Sprevak

4 The SR to Clark and Chalmers

4.1 OEB or ONSB?

4.2 Objections

5 Conclusion

1 Introduction

3524

오토의 확장된 믿음 (OEB)

3525

이 논문은 OEB를 지지하는 기능주의 논변에 대한 새로운 반대를 보여줌

미야조노는 이러한 논변을 기능주의 논변에 대한 “the systems reply”(the SR)이라고 부름

왜냐하면 썰의 중국어방 논변에 대한 SR과 유비

중국어방 논변에 대한 SR에 따르면, 강한 인공지능으로부터 실제로 따라나오는 것은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은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방 안에서 사람과 다른 것들을 구성하는 hybrid system이라는 것

OEB에 대한 기능주의 논변에 대한 SR에 따르면,

실제로 따라나오는 것은 OEB가 아니라 ONSB

Otto-Notebook System’s Belief (ONSB)

ONSB는 두 주장의 연언

ONSB1

ONSB2

ONSB1은 OEB1과 동일함.

차이는 OEB2과 ONSB2

2절은 OEB를 지지하는 기능주의 논변이 가정하는 기능주의 버전

3절은 스프레박의 논변과 그의 논변이 SR에 취약하다는 점

4절: 이 논문의 핵심. SR이 스프레박 뿐만 아니라 클라크와 차머스에게도 강력한 반박이 된다는 것

2 CC functionalism

3 Absurd extended beliefs

3.1 Sprevak’s argument

3528

이 절에서는 스프레박의 논변을 자세히 논의하고 이에 대하여 SR이 강력한 반박을 한다는 것을 보일 것

우선 (1) 클라크와 차머스, (2) 스프레박 (3) 미야조노의 일치와 불일치를 명확히 함.

클라크와 차머스는 CC 기능주의가 믿음에 관한 좋은 이론이며 그 이론이 OEB를 함축한다고 함.

스프레박은 CC 기능주의가 OEB를 함축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그 이론이 믿음에 관한 좋은 이론이라는 것은 거부함.

그 이론은 OEB를 함축할 뿐 아니라 확장된 믿음의 이상한 사례도 함축한다는 것.

미야조노는 CC 기능주의는 믿음에 관한 좋은 이론이라는 점을 받아들임.

CC 기능주의에 대한 스프레박의 도전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지 않음.

그러나 CC 기능주의가 OEB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생각함. (이 점에서 클라크, 차머스, 스프레박과 불일치)

3528

스프레박의 논변은 화성인에 관한 논변을 포함함.

그런 다음 도서관

3528-29

스프레박에 따르면, 기능주의 논변은 이상한 귀결을 도출한다는 것

그 귀결은 마크가 도서관에서 책을 집는 것만으로도 그 책의 내용을 알게 된다는 것

어떠한 믿음이 머릿속이 아니라 책에 물리적으로 실현된 것으로도 그런다는 것

정리하면

마크의 확장된 믿음 (MEB)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Alpha Centauri A)이 태양보다 크다는 마크의 믿음은 책에 물리적으로 실현된다.

MEB는 두 주장의 연언

MEB1: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는 믿음은 책에 물리적으로 실현된다.

MEB2: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는 믿는 사람은 마크이다.

CC 기능주의에 따르면, MEB는 두 전제에서 따라나온다.

첫째,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는 화성인의 믿음은 내적 저장되어 실현됨.

둘째, 기능적 역할에 대한 상식적이고 coarse-grained 개별화에 따르면, 마크의 책이나 화성인의 내적 기억이나 다른 점이 없다.

스프레박이 지적했듯이, 화성인과 마크의 유일한 차이점은 화성인은 머릿속에 잉크 자국이 있다는 것이고 마크는 머리 밖에 잉크 자국이 있다는 것이다.

3529

미야노조의 진단

첫째, 어떤 철학자들은 첫째 전제를 거부한다.(Walter 2010, Wheeler 2010)

그들은 화성인이 잉크 자국으로 저장되는 내적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거부함.

예) Walter는 motivated mark of cognitive와 독립적으로 근거에 기반해서 전제1를 거부함.

그러나 미야조노는 전제1은 그럴듯하다고 함.

둘째, 어떤 사람들은 마크 사례에서 (마크의 책과 화성인의 내적 저장 사이의 기능적 동등성에 관한) 두 번째 전제를 정당화하려면 어떠한 조항(stipulation)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음.

예)

규정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의 연언을 C라고 하자.

스프레박의 논변에서 핵심적인 것은 C에 대한 두 주장이 참이라는 것

(1) 조건 C에서 마크가 선반에서 책을 꺼내는 것이 가능하다

(2) 조건 C에서 선반에서 책을 꺼낼 때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고 마크가 믿는 것은 이상하다.

미야조노는 논변과 관련하여 C가 존재한다고 생각함.

3.2 The SR to Sprevak

3529-3530

스프레박의 논변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은 SR로부터 옴.

기능주의 논변이 실제로 함축하는 것은 MEB가 아니라 MBSB라는 것

Mark-Book System’s Belief (MBSB)

마크-책 체계의 믿음은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는 것이다.

MESB는 두 주장의 연언

MESB1: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는 믿음은 책에 물리적으로 실현된다.

MESB2: 켄타우루스 자리의 알파별이 태양보다 크다는 믿는 사람은 마크가 아니라 마크-책 체계이다.

MESB1는 MEB1과 동일함

MESB2는 MEB2와 다름

3530

이러한 답변은 중국어방 논변에 대한 SR의 기본 발상을 공유함.

....

3530

존이 방에 들어가서 갑자기 중국어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이 존이 아니라 존-방 체계라고 하면 안 이상하게 됨.

많은 철학자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중국어방 논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응이 된 이유임.

3530-3531

SR to Sprevak은 SR to Searle과 동일한 구조를 가짐

스프레박에 따르면 기능주의 논변은 MEB를 함축하는데, 이는 이상함.

화성인은 알파별~~이라는 믿음을 내적 저장소에 물리적으로 실현함.

...

그러므로, 기능주의 논변이 함축하는 것은 마크의 믿음이 아니라 마크-책 체계의 믿음임.

다른 말로, 기능주의 논변이 함축하는 것은 MEB가 아니고 MBSB

3531

SR to Sprevak에 대한 가능한 비판

3531

썰은 강한 인공지능이 존-방 체계가 중국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생각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님.

썰의 반박은 존-방 체계가 중국어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고 따라서 강한 인공지능이 이상하다는 것임.

첫째

썰: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 사람과 종이의 연접(conjunction)이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그럴법하지 않다”

둘째

썰: 존이 자기 머리에 그 체계를 결합하고 설명서와 이후 순서를 모두 기억했다고 해도, 존은 여전히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셋째

썰: “systems reply를 받아들인다면, 위, 심장, 폐 등이 하위체계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존-방 체계가 이해했다는 것을 위가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구분할 원리적인 방법이 없으므로.”

미야조노가 이 논문에서 논의하려는 것은

SR to Searle이 아니고 SR to Sprevak

미야노조의 견해로는, 썰과 같은 방식의 반대는 적어도 스프레박의 맥락에서 설득력이 없다는 것

3531-32

첫째

미야조노는 주체나 체계 X가 P를 믿지만 X의 하위체계들 중 어느 것도 P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그럴듯하다고 봄.

예) 내가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라고 믿지만 나의 인지 메커니즘들 중 어느 것도 그러한 것을 믿지 않는다.

3532

둘째

썰의 둘째 반박은 스프레박에게 적용 안 됨.

왜냐하면 썰의 경우에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스프레박에게는 그러저러한 믿음이 거짓이라고 하면 성립하지 않으므로

(전제가 거짓이라는 것이 판명되면 논증이 틀린 것이 된다.)

3532

셋째

썰의 셋째 반박도 설득력이 없다.

CC 기능주의는 오토와 잉카의 미세한 기능적 차이점을 무시하는 거친 기능주의

예) negative transfer 등은 무시

그러나 클라크와 차머스는 CC 기능주의가 화성인과 위의 기능적 차이점을 무시할 정도로 거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음.

3532

그러나, 이 반박은 쉽게 무시할 수 없음.

썰이 제안했듯, 이 반박은 기능주의에 대하여 독립적인 논변과 관계함.

이 논변은 종종 기능주의에 대한 “the triviality argument”로 불림.

핵심은

주어진 기능적 역할에 대하여, 우리는 기능적 역할을 실현하는 대상들에 따라, 충분히 복잡한 임의에 대상에 대한 매우 거친 기술을 찾을 수 있고 그 기술은 선언적 술어들로 이루어진다는 것.

3533

사소함 논변을 평가하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감.

여기서 미야조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스프레박의 논변을 옹호하려는 목적으로 사소함 논변에 호소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

왜냐하면 사소함 논변은 스프레박의 논변보다 더 급진적이기 때문.

갓프리-스미스는.....

3533

이 절에서

미야조노는 기능주의 논변이 MEB를 함축하고 그것이 이상하다는 스프레박의 주장을 논의함.

스프레박의 주장에 대하여 미야조노는

기능주의 논변은 MEB를 함축하지 않으며, 대신 MBSB를 함축하며 이것이 이상하다고 함.

SR to Sprevak은 썰과 같은 방식의 반박에서 자유로움.

SR이 성공적으로 스프레박의 주장을 위협한다고 해도, 이는 클라크와 차머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님.

4 The SR to Clark and Chalmers

4.1 OEB or ONSB?

4.2 Objections

5 Conclusion

(2019.06.22.)

2019/05/29

서울대 창업동아리는 왜 그랬을까?



서울대 창업동아리가 헛짓거리 했다가 뒤지게 욕먹은 뒤 사과하고 없던 일로 했다. 그 동아리는 손편지를 써서 중고나라와 맘카페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판매하려고 했다. “수험생들에게 좋은 기운을 전해드리고자 서울대생들이 직접 손편지를 쓰고, 공부할 때 사용한 펜을 판매하고 있다”며 편지와 서울대생이 공부할 때 사용한 펜, 서울대 마크가 그려진 컴퓨터용 사인펜 등을 묶음으로 7천원에 판매하겠다고 한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아니고 최민수도 아니고 김연아도 아닌 그들은, 자기들이 명문대에 다닌다는 이유로 새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쓰던 것을 팔려고 했다.

명문대생이 손으로 편지를 써서 수험생들에게 좋은 기운을 전한다는 것은 달마도로 수맥을 잡는다는 식의 발상이다. 1999년도 아니고 2019년에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 명문대생이 편지를 써서 좋은 기운을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열등생이 편지를 써서 나쁜 기운을 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사업을 투 트랙으로 진행할 수 있다. 좋은 기운을 받고 싶은 사람은 명문대생이 쓴 편지를 사고 누군가에게 나쁜 기운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수능 9등급 받은 학생이 쓴 편지를 사서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냥 편지를 보내면 기운이 흡수가 안 되니까 오래오래 나쁜 기운을 흡수하라고 원한 있는 사람이 쓰는 물건에 9등급 학생이 쓴 편지를 넣어둘 수도 있겠다. 몰래 방석에 넣거나 하면 되겠다.

서울대 창업동아리 학생들은 정말 편지로 기운이 전한다고 생각한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고객들을 개돼지로 봐서 그런 사업을 구상한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가 그 동아리 학생들에게 응원의 손편지를 써주면서 “내가 좋은 기운을 담은 편지를 보내니까 7달러 주고 사라”고 하면 그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7달러를 낼까, 아니면 ‘미친놈 지랄하네’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그들은 그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링크: [연합뉴스] “서울대생이 쓰던 펜·손편지 7천원”…학벌 상품화 논란

( www.yna.co.kr/view/AKR20190325070700004 )

(2019.03.29.)


2019/05/28

[과학사] Grant (2006), Ch 7 “The Interrelations between Natural Philosophy and Theology in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Grant (2006), Science and Religion, 400 B.C. to A.D. 1550: From Aristotle to Copernicus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p. 191-224. ]
  
  
  1. The Influence of the Condemnation of 1277 on Natural Philosophy
    1.1. The Supernatural Possibility of Other Worlds
    1.2. The Existence of Void Space beyond the World
  2. The Impact of Religion on Natural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3. The Role of Natural Philosophy in Theology
  4.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the Interaction 
     Between Natural Philosophy and Theology

  
1330년대 장 뷔리당(John Buridan)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여덟 권에 대한 질문들』을 집필함.
이 책의 4권 여덟 번째 질문에서 뷔리당은 “어떠한 힘에 의해 진공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뷔리당은 신의 진공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논증함.
진공이 자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만 신성한 힘에 의하여 창조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는 신학적 질문
뷔리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적 논증을 포함해야 했음.
1272년의 서약은 신학에 관해 논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신학 영역에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부담해야 했음.
뷔리당의 이러한 불안은 오래 지속된 현상이 아니었음.


  1. The Influence of the Condemnation of 1277 on Natural Philosophy
  
진공이나 빈 공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중세 자연철학의 중요한 측면을 형성함.
이러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제4권에서 진공의 가능성을 거부한 것에 기인함.
진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논의의 주요 주제였기 때문에 1277년 금지령에 관계없이 논의되었을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의 존재가능성을 부정했지만 뷔리당은 신이 원한다면 달 공간의 움푹 들어간 곳(concavity of the lunar region)에 진공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함.


    1.1. The Supernatural Possibility of Other Worlds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 장소, 진공, 시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면서 우리 세계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주장함.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질료가 우리 세계에 포함되었으므로 세계를 추가로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
-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고대 세계에서 비판을 받음.
- 비판자들 중 일부는 물질이 실제로 우리 세계를 넘어 존재할 수 있다고 함.
- 심플리시우스(Simplicius)의 논변
• 세상 끝에 있는 누군가가 그 팔을 뻗는다면 장애물을 만나 팔을 뻗을 수 없거나 팔을 뻗을 수 있을 것임.
• 장애물 때문에 팔을 뻗을 수 없다면 장애물의 끝까지 올라가 팔을 다시 뻗을 수 있을 것임.
• 유한한 세계에서 사람은 물질적 장애물의 끝까지 도달할 것이고 결국 빈 공간을 만날 것임.
- 심플리시우스의 논문은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에서 알려짐.
-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인 해석에 약간의 영향을 미쳤을 뿐이며, 세계는 유한한 구형의 우주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인 해석에 거의 위협하지 않았음.
  
1277년 금지령 이후 모든 것이 바뀜.
1277년 이후, 파리 대학의 학생과 교사들은 신이 절대적인 능력으로 우리 세계보다 더 많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인정함.
- 이는 자연 철학자들이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듦.
• 질문(1): (공간, 진공, 장소, 시간 같은) 어떤 것이 우리 세계의 경계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가
• 질문(2):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스콜라 자연철학자들은 각 세계가 그 세계의 중심과 둘레를 가지는, 내장된 체계(self-contained system)이라고 결론 내림.
중세 자연철학자들은 하나의 중심과 둘레만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사상을 포기하고 여러 세계의 동등한 중심과 둘레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시작한 것.


    1.2. The Existence of Void Space beyond the World
   
다른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인접한 세계 사이에 빈 공간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가정됨.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면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합의되는 것.
진공에 대한 중세 때의 논의에서 신이 세계를 초월하여 유한한 공간이나 무한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무시됨.
그 대신, 신학자들은 무한한 진공 영역과 무소부재한 신의 위치에 관한 질문을 연결시킴.
  
- 1277년 금지령의 49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 다른 가설적인 주장을 제기함.
• 49조: “신은 하늘(이나 세계)을 직선 운동으로 움직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진공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
- 진공이 남든 아니든 신이 세계를 직선 운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는데, 신이 세계를 직선 운동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기본 원리에 위배됨.
-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기본 원리
• 원리(1): 진공에서 세계가 움직인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 원리(2): 세계의 직선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 한 세 가지 자연적인 운동(직선 운동, 상하운동, 원 운동)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없다.
• 원리(3): 운동은 항상 한 물질적 공간에서 일어난다.
  
신이 세상을 직선으로 움직이면 그 움직임은 공간과 무관할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불합리하다고 여길 것이지만 니콜 오렘 같은 중세의 자연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직선 운동을 그럴듯하고 이해할만한 것으로 간주함.
이는 이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라이프니츠와 뉴튼의 논쟁에서 뉴튼의 대변인인 새뮤얼 클라크(Samuel Clarke)도 직선 운동을 알기 쉬운 개념으로 간주함.
무한한 공간에 대한 중세 때의 논의가 17세기의 과학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신과 공간에 관한 수많은 토론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보여줌.


  2. The Impact of Religion on Natural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세 세기 이상 가르치면서 방대한 비평집이 제작됨.
논문의 저자들은 흔히 제1원인(prima causa)으로 언급된 신이 아무 것도 없이 세상을 만들었고 모든 사건이나 결과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확고히 믿었음.
그러한 논문들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신학적이거나 종교적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자연철학은 교양 학부에 속하고 신학 교수들과 무관한 주제였음.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의 핵심을 이룬 다섯 개 저작에 나오는 질문 310개
• 이 중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 의견, 사상과 개념에 관한 것
• 217개는 신학이나 신앙과 무관함.
• 신과 신앙을 언급하는 것은 93개 질문뿐
- 자연철학자들이 논문에서 신이나 신앙을 말할 기회가 있었을 때, 보통은 네 가지 범주 중 하나에 관한 것이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범주는 처음 두 개보다 훨씬 더 중요함.
• 범주(1): 자연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이나 신성에 관해 언급한 곳에서 신을 언급함. 그러한 구절은 상대적으로 희소함.
• 범주(2):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으로 이는 기독교 신앙에 반대됨.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에는 시작이 없고 끝이 없으며, 사건이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함.
• 범주(3): 신이 자연 현상과 비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단순히 자연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됨.
• 범주(4): 중세 자연철학에서 신의 절대적인 힘은 논리적인 모순과 관련되어 사용됨.
  
중세의 자연철학자들은 신의 절대적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자연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함.
네 가지 범주에는 종교나 신학에 관한 것이 포함되지 않고 대부분은 자연철학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토론임.
  
중세의 학자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기독교화 하려는 열망이 없었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와 그의 학생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견해는 14세기와 15세기 학자들에게도 적용됨.
알베르투스는 신학과 종교 문제가 자연철학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고 후계자들도 마찬가지.
뷔리당은 자연의 운동을 신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함.
뷔리당은 신앙에도 문제가 없었고 계시를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였으나 자연 철학은 초-자연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함.


  3. The Role of Natural Philosophy in Theology
  
신학과 신앙이 자연철학에 피상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이라면 자연철학은 신학이 발전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14세기 『신학명제집』(Sentences) 비평에서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비평자들에게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고 자연철학과 논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이 보인다는 것.
교회 당국은 이러한 경향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함.
교황 그레고리 4세(1227-1241)와 클레멘트 6세(1342-1352)는 철학적 질문에 지나치게 몰두한 신학자를 비난했고 1366년 파리 대학은 신학과 자연철학을 가능한 한 분리하려고 시도함.
그러나 교회 당국에서도 대부분이 자연철학과 논리학 훈련을 받았고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그러한 학문 분야가 필요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노력은 실패함.
16세기 신학자인 존 메이저(John Major)는 “약 2세기 동안 신학자들은 순전히 물리학적 문제, 형이상학적 문제, 수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함.
  
자연철학이 신학에 미친 영향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관한 논문에서 자주 논의되는 질문들에서 나타남.
“천국이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었는지 여부, 구체의 수가 여덟 개인지 아홉 개인지 아니면 그 이상이나 이하인지, 천국이 구형인지 여부” 등을 묻는 것
당시 신학에서 널리 퍼진 경향은 논리학, 자연철학, 수학의 분석 기법을 다양한 신학적 질문에 적용한 것.
  
신에 관한 질문은 대개 신의 능력, 지식, 신이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었던 일, 신이 의도한 일에 대한 것 등.
신은 논리적인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가정됨.
   
중세의 자연철학자들은 무한대의 문제와 무한소의 문제에 몰두함.
수학적 연속체의 무한한 분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춤.
신학자들은 자연 철학에서 발전한 수학적 개념을 신의 다양한 가능한 행동에 연결시킴.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는 신이 무한한 무리의 천사들을 어떻게 한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지를 기술하며 시간은 무한히 분할가능하며 각 시간의 부분에서 천사를 창조했다고 말함.
  
중세 신학자들은 신이 편재하는 무한한 공간이 우리 세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가정했고, 무한대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은 공간적인 것을 이외의 것으로 확장됨.
중세 때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무한한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설적인 요소를 설명하지 못함.
신학자가 아닌 뷔리당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 대한 질문들』 제3권 15번 문제에서 “무한한 크기가 있는지”를 묻고 신이 그러한 것을 창조할 수 없다고 함.
“무한한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이 혐오스럽기 때문에 더 큰 것을 창조할 수 없”고 무한대보다 더 큰 것이 없다면 신이 무한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
그러나 신이 무한한 것보다 더 큰 것을 만들 수 없다면, 신의 절대적인 능력은 제한됨.
뷔리당은 신학자가 취했을 경로를 따랐을 뿐이지만 신학 영역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임.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임.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가능하거나 실현 가능한 것으로서 유지하려고 함.
이에 대하여 실라(Sylla)는 오캄이 “자연 철학에 적절한 자율성을 허용”했다고 평가함.
  
질적 변화에 대한 양적・수학적 설명은 1330-1340년대 옥스퍼드 대학의 머튼 콜리지(Merton College)에서 처음 개발됨.
1350년대 파리 대학의 니콜 오렘(Nicole Oresme)은 질적 변동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논문을 구성함.
오렘은 속도를 질로 다루었기 때문에 “평균 속도 정리”(S=1/2at²)라고 불리는 기하학적 증명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수학적 증명을 함.
오렘은 낙하 법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16세기 갈릴레오가 이를 응용함.
이는 신학은 자연철학에 수학적 적용을 할 근거를 제공했음을 보여줌.


  4.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the Interaction 
     Between Natural Philosophy and Theology
  
신학은 자연 철학에 비교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에, 자연철학・논리학・수학은 신학에 큰 영향을 끼쳐서 학문을 개혁했으며 해당 주제를 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철학으로 전환함.
중세 신학자들은 가능한 한 합리적인 용어로 자신들의 신앙에 관한 것을 설명하려고 함.
교회가 신학을 덜 분석적이고 영적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함.
  
중세 후기의 자연 현상 탐구에서 유일한 제약은 계시와 관련됨.
계시는 신에게서 직접 얻은 진리나 경전에 있는 계시된 말씀으로 구성됨.
신학자들은 신앙을 더 잘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계시된 진리를 분석함.
신학자가 계시된 진리에 반하는 결론에 도달하면 그러한 결론을 거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단으로 고소당했음.
그러나 계시된 진리와 반대되는 제안이나 결론에 대해 토론할 수는 있었음.
즉, 논증하기 위하여 어떠한 가설을 단순히 가정하는 것은 가능했고 이러한 방법은 1277년 금지령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앙 교리를 논의한 방법이 됨.
  
자연 철학자들은 성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서 참이라고 여기는 주장과 충돌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함.
“성경의 권위는 모든 인간의 독창성보다 크다.”
『신학 대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을 두 가지로 받아들임.
“첫째, 성경의 진리는 반드시 침해받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 때, 설득력 있는 주장이 없다면 누구든지 감히 그 본문의 확실한 의미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면 안 된다.”
이러한 아퀴나스 태도는 성경과 자연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자들의 태도를 형성함.
13세기-15세기의 신학자들이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 현상이나 물리적 현상에 대한 성서상의 기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음.
  
교회와 신학자들은 성서 구절의 해석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채택하여 과학과 자연철학의 진보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함.
문자적 ​​해석은 자연철학적 해석으로 대체되었고, 교회가 갈릴레오를 핍박한 시대에도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고 확신함.
이와 대조적으로, 이슬람에서 코란은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해석됨.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코란에 많은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며 “자연 현상에 대한 많은 관찰과 현대 과학적 발견과 완전히 일치하는 설명 세부 사항을 포함한다”고 함.
신학자들이 대학에서 획득한 분석 기술을 사용하여 자연 철학과 신학에서의 문제에 대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신학자들은 신학을 자연 철학, 논리학, 수학으로 구성된 분석 기술의 큰 저장소로 만듦.
그런데 이러한 일은 야만인들의 침입 이후 쇠퇴한 서유럽의 문화에서 발생하고 그리스 정교회의 본거지인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2019.05.27.)
   

[KOCW] 경제학 - 파생상품론

■ 강의 영상+자료 ​ 파생금융상품론 / 이시영 (동국대, 2014년 1학기) ( www.kocw.net/home/cview.do?cid=dad6dbf28a4e66d0 ) ​ ​ ■ 강의 자료 ​ 파생상품론 / 윤평식 (충남대, 2011년 2학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