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rles Coulston Gillispie (2016),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
Charles Coulston Gillispie (1960),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찰스 길리스피, 「제6장. 물질의 합리화」, 『객관성의 칼날』, 이필렬 옮김 (새물결, 2005), 239-298쪽. ]
새로운 화학의 방향을 정립한 라부아지에 [239]
- 라부아지에(1743-1794)는 화학의 새 방향을 정립함.
- 연소라는 것이 플로지스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산소와의 화합이라는 것을 밝힘.
- 대수학적 표현양식을 사용하여 오늘날의 화학 방정식과 유사한 독특한 결합 양식과 그에 근거한 명명법을 도입함.
라부아지에의 주요 저서 <화학원론> [240-]
라부아지에는 1789년에 <화학원론>을 출판함.
이 책의 목적은 화학을 올바른 방법의 기초위에서 출발하도록 하기 위함임. 그는 “화학을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착수하기로” 한 것임.
라부아지에 이전의 화학은 용어만 무질서하게 모여 있는 과학이었음.
수학이나 역학은 공리와 정의로부터 결과가 명확하게 도출되는 학문이었음.
라부아지에는 화학을 그러한 명확한 학문으로 만들고 싶어 했음.
[241]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화학 원론>은 단순한 방법론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음.
거기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위대한 실험상의 발견들에 대한 설명들이 들어 있음.
18세기 초의 화학은 정량적인 특성을 가지지 못했음.. 즉 화학 실험실에서 무게 측정 광경을 찾아볼 수가 없었음.
라부아지에의 실험은 달랐음. 그의 실험실에서는 과정이 중요시됨.
특히 신중하게 실험 전후의 중량을 측정하는 정량적 특성을 보여줌.
이것은 그의 화학에 객관성을 부여한 것임.
* * *
플로지스톤 이론 [241-]
기체의 존재 여부를 확실히 알지 못했던 18세기 화학은 플로지스톤을 상정하여 화학 반응 등을 이해하려고 함.
플로지스톤은 슈탈(1660-1734)의 생기설에서 유래함.
석탄, 황, 인 등이 불에 타서 형태 없는 잿더미로 되는 현상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서 생기는 현상으로 생각함.
슈탈은 산소의 취득이 있는 곳에서 플로지스톤의 손실을, 산소의 손실이 있는 곳에서 플로지스톤의 취득을 보았던 것임.
이것은 거울에 비친 화학, 거꾸로 된 이론이었음.
플로지스톤은 올바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일종의 화학의 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함.
이로써 화학은 연금술의 신비적인 숲을 탈출할 수 있었음.
플로지스톤 이론은 화학적 현상에 대한 합리적 접근 방법이었지만, 정량적인 특성을 갖추지 못했으며, 1765년 이후 기체 화학에서의 연이은 발견들과 조화되지 못하여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게 됨.
기체의 발견 [243-]
영국 국교회 목사 스티븐 헤일즈(1671-1761)는 어떤 “공기”가 많은 유기 물질과 특정한 알칼리 토류에 “고정”될 수 있음을 증명함.
즉 공기가 그러한 물질과 결합한다는 것을 알게 됨.
이 공기는 지금의 이산화탄소임.
이후 조셉 블랙(1728-1799)은 탄산마그네슘의 산화물을 얻기 위해 가열하면 언제나 일정량의 무게가 감소한다는 것을 발견함.
이에 블랙은 불은 알칼리 토류에서 공기 자체와 같은 무언가 탄성적인 기체 성분을 몰아내는 것이라 생각함.
그는 처음으로 발견된 이 기체를 “고정 공기”라고 부름.
블랙의 화학 [244-]
화학자의 기술의 상징이 증류기와 레토르트로부터 천칭으로 대체된 때는 블랙부터였음.
블랙의 독자성은 그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량 분석 방법의 엄격성, 시약의 순도에 대한 주의, 어떤 연구에나 수반된 끈기 있는 추론, 실험 전술에 관한 철저한 작전 등에 있었음.
그는 정량 화학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함.
[244-]
블랙은 “고정 공기”를 발생시키기 위해 백악을 염산에 녹이면 그 무게의 40% 정도가 줄어듦을 발견함.
소실되는 “고정 공기”가 40%에 이른다는 것임.
그리고 백악을 태워서 생석회를 만들 때도 무게가 43% 감소한다는 것을 알아냄.
그 결과로 백악의 40% 정도가 “고정 공기”라는 것을 증명함.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블랙의 중량 분석의 방법 때문이었음.
그러나 그는 이 고정 공기를 모아 그것의 성질이 어떠한지를 탐구하지 않아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함.
헨리 캐븐디시(1731-1810) [245-]
1765년 캐븐디시에 의해 기체에 대한 직접적, 정량적 연구가 시작됨.
그는 스티븐 헤일즈의 기체 수조에 들어있는 물을 수은으로 대치함으로 용해에 의한 손실 없이 이산화탄소를 모을 수 있었음.
그것으로 가벼운 “가연성 공기”(수소)도 모았음.
프리스틀리(1733-1804) [246-]
1772년 프리스틀리는 “초석공기”(일산화탄소)와 “염산공기”(염화수소)의 발견을 보고함.
또한 보통 공기의 성질을 시험하는 데 쓸 수 있는 다른 “초석공기”(아산화질소)도 발견함.
프리스틀리는 산화제2수은을 가열하여 어떤 “공기”를 얻음.
즉흥적으로 그 속에 양초를 넣어 보았더니 그것은 횃불처럼 빛났음. 그것이 산소였음.
프리스틀리는 실험에 있어 관례에 구애되지 않는 성격이었음.
그는 스스로 자기에게 화학 지식이 있었다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고 말했음.
산소의 발견도 즉흥적인 행동으로 인한 것임.
* * *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성격 비교 [247-]
프리스틀리는 독창적이고 열광적이며 소박하고 산문적이었음.
그는 관대하고 경솔한 면도 있었음.
그의 스타일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판단력과 품위의 부족을 드러냈음.
반면에 라부아지에는 숙련되고 과묵하며, 노련하고 비판적이었음.
그는 프랑스 전문 지식의 관료적 전통 속에서 자신과 국가에 봉사하는 데 야심적이며, 일련의 실험처럼 신중하게 어떤 정해진 틀 속에서 그의 생애를 계획했음.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수학 부문의 인물들, 라플라스, 라그랑주, 몽쥬 등과 교제했음.
그들은 개념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사람들이었음.
라부아지에가 당시 화학의 전반적인 불만족스러운 이론 상태에 흥미를 느끼며. 플로지스톤 이론이 가지고 있던 모순, 딜레마 등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임.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처럼 새로운 기체의 발견 등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 큰 틀, 원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임.
라부아지에의 연구 [249-]
플로지스톤 이론에 의하면 황이나 인을 태우면 플로지스톤이 빠져 나가기 때문에 무게가 즐어들어야 함.
라부아지에는 그러한 경우 오히려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게 됨.
그는 이러한 실험 결과를 통해 연소 중에 플로지스톤과 같은 것이 방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량의 공기가 흡수된다고 추론함.
또한 그는 황과 인만이 아니라 연소와 하소로 무게가 증가하는 모든 물질의 경우로 이 추론을 확장함.
실험들은 그의 추론을 확인해줌. 플로지스톤 이론은 틀린 것이었음.
[251]
라부아지에의 연구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연구와 실험의 방향은 결정됨.
즉 라부아지에는 “발효나 증류 또는 모든 종류의 화학변화에 의하여 방출되는 기체에 관하여 그리고 아주 많은 물질의 연소를 통하여 흡수되는 기체에 관하여 계획하고 있는 일련의 긴 실험이 시작”한다고 기술함.
그는 이러한 실험 등을 통해 연소의 원리, 산의 생성 원리 등을 그의 주요 목표로 삼고 연구함.
라부아지에가 직면한 난점 [251-]
그는 연소와 호흡은 공기 중의 그 무언가와 결합하는 것임을 확신함.
그 무언가는 산소였음.
그 당시 언어로 말하자면 ‘고정 공기’가 산소였음.
그런데 스티븐 헤일즈가 확인한 “고정 공기”(이산화탄소)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나타냄.
그 공기는 호흡과 연소의 재료가 아니라 그것들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고, 보통 공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음.
“고정공기”의 정체에 대한 혼란이 있었음.
[252-]
라부아지에는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체가 발생한 모든 실험을 되풀이하여 그 기체의 생성 경로를 파악하려고 함.
아마 라부아지에는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반응과 산소를 필요로 하는 반응을 구별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것임.
그가 해야 했던 일은 연소, 녹이 스는 것, 호흡의 화학적 유사성을 밝히는 일이었음.
라부아지에는 대기가 산소를 포함하는 혼합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음.
라부아지에의 한계 [255]
갈릴레오, 데카르트, 케플러, 뉴턴, 다윈 등은 위대한 발견을 위한 정열을 가졌음.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발견을 위한 정열이 없었음.
그의 정신의 명석함은 오히려 상상력, 소박한 호기심, 예기치 못한 사물의 본성에 대한 공감 등을 배제한 것인가?
그의 실험적 방법의 완전성 자체가 오히려 한계로 작용했음.
예를 들어 연소 중에 인은 방출될까, 화합할까?
무게를 달아보라. 그러면 천칭이 해답을 말해 줄 것이다.
증가한 무게는 대기로부터 온 것일까, 아닐까?
측정해 보라. 그러면 감소된 부피가 해답을 말해 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실험은 극히 적절한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 또는 아니다 하고 답할 수 있도록 유례없이 세련되게 계획되었음.
여기에 결함이 있었음. 그것은 이미 발견된 것의 논리였음.
여기에는 새로운 발견이나 미지의 것에 대한 모험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임.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시너지 효과 [256]
화학은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묘한 공존 관계에서 이득을 얻었음.
프리스틀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데 뛰어났지만 이론적 경향이 결여되었음.
그래서 프리스틀리는 그가 발견한 것을 이해 못했음.
라부아지에의 명석함은 발견의 수단으로써는 소용이 없었음.
그는 새로운 발견을 하지 못했지만 새로 발견된 현상이나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음.
그는 새로운 발견들을 이해했던 것임.
프리스틀리는 발견하고, 라부아지에는 그 원리를 파악했던 것임.
산소의 발견 [256-]
수은 산화물은 독특한 성질을 가짐.
수은을 적당히 가열하면 수은은 붉은 산화물이 됨.
더 세게 가열하면 다시 수은이 됨.
(2Hg + O₂ -> 2HgO, 2HgO -> 2Hg + O₂)
처음 가열과정에서 수은은 산소와 결합하고(연소), 두 번째 가열에 의해 산소가 방출됨(환원).
대부분의 물질은 환원시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지만 수은산화물만은 그와는 달라서, 환원시 이산화탄소 대신 산소를 방출함.
이런 것을 몰랐던 까닭에 1774년 2월 바이엔은 산화제2수은을 하소시킨 후 발생한 이 기체(산소)를 고정공기(이산화탄소)라고 보고함. 잘못된 결론이었음.
칼 빌헬름 셀레(1742-1786)도 그 이전부터 산소 실험을 했으며, 산화제2수은과 산화은으로부터 산소를 얻었음. 그는 이것을 “불의 공기”라고 불렀음.
[257-]
1774년 8월 프리스틀리는 처음으로 산소를 분리하여 이 기체가 물에 녹지 않고 연소를 돕는 성질이 있다고 하여 이산화탄소와 구별함.
그러나 그는 이 기체를 그가 잘 알고 있던 소기라고 잘못 생각했음.
1775년 3월에 그는 이 기체의 성질을 확인했으며,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완전한 조성도 이해하게 되었음.
어떻게? 그는 닥치는 대로 시험해보고 나서 이 새로운 기체가 연소와 호흡을 도우며, 소기(아산화질소)와 반응하여 부피가 줄어든다는 것도 발견함.
그는 그 혼합물에 초석 공기(일산화질소)를 가했더니 놀랍게도 그것은 또다시 원래 양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음.
그래서 신선한 시료(산소)를 가지고 소기에 대하여 시험해 본 결과 그는 그것이 보통 공기의 네 배나 다섯 배의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얻음.
이것은 보통 공기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며, 그 부피의 20퍼센트는 “순수한” 공기(산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음.
프리스틀리는 이 순수한 공기를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라고 불렀음.
프리스틀리는 산소라는 새로운 기체를 발견하고서도 플로지스톤 이론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음.
[258-]
라부아지에는 산화제2수은 실험을 프리스틀리보다 빨리 이해했음.
그는 1774, 1775년 그 실험을 되풀이함.
그는 수은산화물을 하소시켜 순 수은으로 환원시킴.
처음의 수은산화물과 환원된 수은 사이에는 54그레인의 차이가 있었음.
그 하소에 의해 발생한 기체의 부피는 78세제곱인치였음.
그러므로 78세제곱인치의 공기의 무게가 54그레인이라는 것, 그리고 1세제곱인치은 3분의 2그레인(54/78)에 조금 못 미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보통 공기의 무게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음.
이로부터 그는 잘못된 결론을 내림.
그는 이 기체가 이산화탄소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보통 공기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했음.
그것은 “보통 공기일 뿐 아니라 호흡이나 연소에 더 적합하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공기보다도 순수하다는 것을 확신했”음.
* * *
[261]
라부아지에는 <질산중의 기체의 존재 및 그 산을 분해하고 재합성하는 방법에 대한 보고>(1776)에서 모든 산에 공기가 들어있으며, 각각의 산에 특유한 성분에 의하여 각기 다른 산이 생성된다는 확신을 보여줌.
“공기뿐만 아니라 공기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모든 산에 들어 있으며, 그것이 “산성을 구성한다”라고 명기함.
[263]
<쿤켈의 인의 연소에 대한 보고>(1777) 등의 논문을 통해 “순수 공기”가 산의 원리라고 한 분석 방법을 인산과 황산으로 넓힘.
그러나 그 요점은 그의 실험을 대기를 대상으로 하여 실시했다는 것임.
결론은 “대기는 약 4분의 1의 플로지스톤 없는 호흡에 아주 적절한 공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머지 4분의 3은 유독한 공기, 미지의 성질을 가진 기체로 되어 있다”고 지적함.
[264-265]
그는 1778년 <산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통해 “이제부터는 나는 화합상태, 즉 고정상태에 있는 플로지스톤 없는 공기, 즉 호흡에 아주 적절한 기체를 산을 생성하는 원리(acidifying principle)라고 부르겠다.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 더 좋다면 산을 생성하는 원리(oxygenic principle)이란 이름을 붙이겠다”
라부아지에는 순수한 공기 즉 호흡에 아주 적절한 공기가 산을 구성하는 원소라는 가설을 힘차게 밀고 나감.
그러나 애석하게도 라부아지에는 아직 원소로서의 산소라는 생각에 도달하지는 못했음.
물의 합성 [266-]
연소 현상에 관심이 있던 라부아지에는 수소의 연소에도 관심을 가졌음.
수소가 연소하면 무엇이 생길까?
처음에는 수소의 연소후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연성 물질의 소실은 연소의 결합설보다 연소의 방사설이 더 유용한 것처럼 보였음.
1781년 프리스틀리는 가연성공기와 보통의 공기를 전기불꽃에 의하여 폭발시켜 생성물의 무게를 측정하려 했지만, 생성물을 발견하지 못함.
다만 용기 내부가 축축해졌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음.
1783년 캐븐디시가 이 실험들을 되풀이했는데, 이 반응이 내부 공기의 부피를 5분의 1정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실험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생성된 이슬을 모두 모을 수 없었음.
그는 이 이슬에 흥미를 느껴 확대된 규모의 실험을 통해 이 수분이 순수한 물이라는 것을 발견함.
당시 영국의 제임스 와트, 그리고 프랑스의 가스파르 몽쥬도 똑같은 발견을 독립적으로 거의 동시에 함.
캐븐디시는 물을 합성했지만 그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
[267]
이에 반하여 라부아지에는 일견 극히 단순한 물질이고 고전적으로도 가장 직관적으로 파악되고 있던 원소인 물이, 라부아지에식 명명법을 예상하여 말하면, “물을 만드는 기체”(hydrogenerative gas)의 산화물이라는 것을 즉시 이해했음.
그는 50파인트의 가연성 공기와 25파인트의 산소를 연소시켜 660그레인의 물을 얻음.
이 실험은 연소를 산소가 화합하는 화학반응으로 이해하는 개념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는 플로지스톤을 추방하는 싸움에서 결정적인 것이었음.
이처럼 산소의 결합적 역할을 중심으로 하는 화학의 합리화는 플로지스톤 화학을 정면에서 공격하여 궤멸시킴.
화학 혁명은 라부아지에의 연소 개념을 모든 화학 반응으로 확장한 것.
그 화학의 연구 대상은 물질의 성질이 아니라 물질의 명확한 화합과 분리가 됨.
이제부터 화학자는 양을 측정하게 됨.
화학에서 객관성의 기초는 어느 학문보다도 깊이 양적 관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임.
라부아지에의 질량보존의 법칙 [269-]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정식화했다고 말함.
그러나 그것은 라부아지에 과학의 전제 조건이었지, 그의 과학이 발견한 것은 아니었음.
“자연과 인공의 어느 작업에서나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 실험 전후에는 등량의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공리로서 설정해야 한다.” <화학원론>
라부아지에의 명명법 [271]
<화학의 명명법을 개혁하고 완성할 필요에 관한 논문>(1772)
“화학의 연구와 교육에 도입되어야 할 중요한 방법은 그 명명법의 개혁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언어, 관념들의 변천 속에서 자연의 질서를 포착해낸 언어는 반드시 교수법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교육적이며 동시에 방법론적인 목적에 따라 라부아지에는 연구를 멈추고 동료들과 함께 화학 언어학을 도입함.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이산화탄소, 염화나트륨 등과 같은 명칭은 그의 화학언어학에 큰 빚을 지고 있음.
라부아지에와 그의 동료들은 <화학명명법>을 논문집 형태로 1787년 출판함.
* * *
라부아지에의 칼로릭설 [276-]
그것은 뉴턴의 에테르처럼 이론의 구조속으로 구성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들어감.
기체는 서로 반발하는 것처럼 보임. 즉 쉽게 확산되는 성질을 가짐.
특히 열을 가하면 부피가 늘어남. 열은 반-인력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기체의 상태를 반인력으로서의 열의 삼투’라고 논한다면, 그 매질인 칼로릭은 반에테르였음.
열은 기체를 서로 반발하게 만드는 반-인력의 성질을 가지게 함.
이러한 열을 전달하는 매질을 칼로릭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음.
라부아지에도 뉴턴과 똑같은 이유에서 하나의 매질을 도입했던 것.
즉 능동적인 이론의 구성 요소로서가 아니라, 그의 이론을 쉽게 이해시키기 이한 목적으로 도입한 것.
[277-]
라부아지에와 공동으로 열을 연구한 라플라스는 열에 대해 라부아지에와는 견해가 달랐음.
라부아지에는 열의 칼로릭론자였고, 천체 역학에서 뉴턴을 완성한 라플라스는 운동으로서의 열이라는 견해를 가짐.
그는 열의 칼로릭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의 본성에 관한 물리학자의 견해는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 전체에 삼투하는 유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체의 온도와 열용량에 따라 각기 다른 정도로 물체를 투과한다. 그것은 물체와 결합할 수도 있는데, 이때는 온도계에 영향을 주기를 그치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자유롭게 흐르기를 그친다. 그것이 자유열을 형성할 때만 유리상태인데, 이 상태가 물체에서 열을 평형에 달하게 한다.”
[279-]
물질에 관한 과학은 어느 것이나 두 가지 문제를 지님.
하나는 입자의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에서의 현상의 전파임.
라부아지에가 칼로릭을 도입한 것은 후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음.
그것은 열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연속적인 매질임.
후에 칼로릭은 에너지 역학으로 계승되며 사라져서 열역학이라는 비가역적인 대하 한가운데로 퍼지고, 그의 상응하는 에테르는 힘의 장과 동일시되어 상대성 이론 속으로 모습을 감춤.
라부아지에 화학의 수학화의 실패 [283-284]
라부아지에는 금속 용액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일종의 공식을 만들었음.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최초의 화학방정식이 될 수도 있었을 것.
이러한 공식은 화학을 수학화하려는 라부아지에의 참신함을 보여주는 것
그러나 그것은 한계를 가짐.
라부아지에는 그를 지배하고 있던 과학철학의 결점을 벗어날 수가 없었음.
그 과학철학이란, 뉴턴 물리학의 방법과 사물의 형상과 종을 분류하는 베이컨적 박물학의 논리가 섞인 것.
그러나 그 과학철학에서 박물학의 논리는 이론물리학자의 추상과 수학화라는 정밀한 방법보다 우선하는 것.
그의 <화학명명법>에는 이러한 화학 분류의 박물학이 명백히 드러남.
[288-]
그는 산에 관한 마지막 논문에서 화학의 수학화를 꾀했음.
그의 방정식은 오늘날의 화학방정식과 유사하지만 그의 방정식의 계수는 시약의 무게를 나타내는 것.
라부아지에는 원자를 믿었음.
그 원자의 개념을 사용하여 계수를 나타냈다면 오늘날 사용하는 화학식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는 그의 화학과 원자를 결합하려 하지 않았음.
결국 새로운 화학은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를 떠나 영국의 보일에게로 이동하게 됨.
* * *
화학적 원자론의 확립 [289-]
- 화학은 고대의 형이상학적인 원자론을 과학 이론으로 승격시킴.
[290-]
베르톨레(1748-1822)는 화학 반응 속도와 진행 정도는 화학적 성질의 함수가 아니라 시약의 양과 농도의 함수라는 것을 밝힘.
프루스트(1754-1826)은 혼합과 화합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구별함.
화학의 발견으로서가 아니라 화학의 공리로서 현재 배수비례의 법칙으로 알려진 원리를 정함.
이러한 발견들은 양적 화학의 개념을 지지하는 것.
화학 반응을 원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의 실마리가 됨.
[291-]
존 돌턴(1766-1844)은 화학 결합이 원자 대 원자의 결합이라고 하는 가설을 세움.
그의 과학 스타일은 모형으로 사고하는 도식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음.
화학적 원자론의 성공은 때에 따라서는 참신한 모형에 의한 사색이 유리할 수도 있다는 좋은 예가 됨.
그는 용해도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기체 원자의 상대적 중량을 측정하기 위해 화학적 화합 당량으로 나아감.
돌턴은 “최대 단순성의 원리”와 함께 원자 가설을 화학에 도입함.
이 가설에 의하면 두 원소가 결합하여 단 하나의 화합물을 만들 때는 AB라는 이원자 화합물이 됨.
몇 개의 화합물이 된다면, 이원자 화합물 다음에는 삼원자 화학물을 만듦.
그는 상대적 중량을 도입함.
수소의 중량을 1로 하면 산소는 5.66, 질소는 4, 물은 6.66이라는 것이 돌턴이 얻은 결과였음. 이 결과는 개선되어 산소는 8이 됨.
[297]
돌턴은 이러한 더 나아가 결합을 하는 원자의 수에 대해 생각함.
이리하여 서로 결합하는 모든 화학 원소의 수 및 무게를 결정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에 착수하게 됨.
<화학 철학의 새 체계>에서 돌턴은 입자의 크기라는 답할 수 없는 문제를 제쳐놓고 중량과 수에 주의를 집중함.
“단순 물질 및 복합 물질의 궁극 입자의 상대적 중량, 복합 입자를 구성하는 기본적 입자의 수, 이러한 것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과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목적이다.”라고 말함.
이렇게 돌턴은 화학 혁명을 완성함.
[297-]
“최대단순성의 원리”는 오류임.
돌턴에게 물은 HO였고 산소의 원자량은 8이었음.
그의 중량 측정은 대부분 부정확했음.
사실에서는 자주 틀렸지만 원리에 있어서 그는 옳았음.
과학의 진보에서 화학이 중요한 위치로 이동한 것은 돌턴부터였음.
돌턴은 라부아지에가 극복했던 모든 난문제, 즉 연소와 반응의 이론, 정량기술, 용어의 합리화 등을 모두 이것들에 수반되는 화학 지식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이용했음.
돌턴은 그것들에다 17세기의 입자 철학을 읽고 얻은 옛 지혜를 그대로 적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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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턴은 그의 원자론을 이렇게 말함.
“어떤 철학자들은 모든 물질이란 아무리 다른 것일지라도 같은 것이며, 그것들의 외양이 심하게 다른 것은 그것들에 전해지는 어떤 힘 및 결합이나 배열의 다양성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이 그(뉴턴)의 생각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의 생각도 그렇지 않다. 나는 서로 변형되는 일이 절대 있을 수 없는 기본적 입자라고 불리울만한 것이 상당수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돌턴이 화학의 수학화에 기여한 것은 바로 그의 원자론임.
화학의 수학화를 위해서는 유동체을 다루는 화학보다는 셀 수 있는 입자를 다루는 화학이 더 낫기 때문임.
(2024.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