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tienne Gilson (1949), Being and Some Philosophers (Toronto: The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pp. 74-107.
E. 질송 지음, 「제3장. 본질과 실존」,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론의 쟁점과 그 전개과정』, 정은해 옮김 (서광사, 1992), 139-193쪽. ]
본질 형이상학의 관점
139-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에 따라 파악된 하나의 개별 존재 내에서 참으로 있는 것은, 이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 되게 하는 형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어떠한 형이상학 내에서도 구체적 개별자들의 형상은 질료로부터 분리되어 존속하지 않는다.
이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를 때 왜 감각 세계 내에서 현실적 실재는 “실체”인가에 대한 이유다.
그래서 형상에 대해 “현실적으로 있는 것 속의 참으로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구체적 현실적 실재가 질료와 형상의 복합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플라톤적인 이데아들로 바꿔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은 “우시아”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실재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물의 현실적 실재성을 지적할 때는 “존재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참으로 실재적인 것” 즉, 가지적 형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형상은 그것의 사물의 여러 기능들의 가장 내적인 원리로서 간주될 때는 “본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지적 정의의 가능적 대상으로 간주될 때는 “본질”
철학의 연구 대상이 실재 안의 가지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만약 주어진 어떤 사물 속에서 참으로 있는 것이 그것의 본질이라면, 본질 자체가 존재라고 말하도록 하자.
우리가 이처럼 이야기함으로써 본질 형이상학이 등장한다.
하지만 주어진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적 세계에 남아 있는 동안에도 안전하게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인 듯이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주의는 수세기에 걸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이 뒤섞인 오염적인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되는 한, 아비첸나가 출발점이 된다.
아비첸나의 본질의 3차원
141-
아비첸나는 본질들이 사물들 자체에 있거나 지성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다른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될 수 있다.
첫째, 그 자체로 어떤 사물이나 어떤 지성에 관계되지 않은 것으로 취해진 본질.
둘째, 개별 존재들에 관계된 것으로서의 본질적 측면, 셋째, 지성 안에 현존하는 것과 같은 본질의 측면.
셋째, 지성 안에 현존하는 것과 같은 본질의 측면
얼핏 볼 때 철저한 구분인 것 같다. 그러나 처음에 아비첸나는 본질들이 사찰들 자체 안에 또는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했는데 첫 번째 측면에서 본질들이 사물들이나 마음 안에서 또는 그들 자체로서 고려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당히 모순된 모습이다.
여기로부터 우리는 만약 본질들이 사물들이나 마음 안에 있을 때만 실존한다면, 그들이 자체적으로 있을 때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해결될 수 없는 질문으로 보이는 데 아비첸나 자신은 본질들을 개별적 존재들의 실재에 관계된 그래서 지성들에 의해 파악되고 말하자면 사물들과 마음들 사이에 떠있는 그런 중립적인 실재들인 것처럼 정립하였다. 참으로 이해될 수 없는 입장이다.
질송은 이러한 설명이 심리학적이어야 한다는 점에 우려한다.
아비첸나의 설명에 따르면 본질은 사물이나 마음에서 발견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하지만 돌을 예로 들어보자.
어떠한 돌이 없다고 할지라도 “돌임”이라는 본질은, 그것을 파악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는 한, 하나의 단순한 가능자로서 여전히 실존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돌이라는 본질은 마음과 사물에 전적으로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다.
여기서 아비첸나의 심리적 환상이 성립된다.
본질들이 오직 마음이나 사물 속에만 실존한다고 말한 후에 마음이나 사물이 없을 경우는 본질들이 자체적으로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아비첸나의 철학 속에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본질의 존재라는 기묘한 유형의 존재의 출현이다.
곧, 어떤 인식 주관이나 개별적인 실존물 내에서의 실현 여부에 무관하게 본질 자체에 속하는 바로 그런 존재이다.
자체적인 본질의 무규정성
143-
그러한 본질들이 있다고 가정할 때 주요한 특성들은 그들이 자체적으로 취해질 때 본질들은 바로 그들 자신 자체인 것이다.
자체적으로 배타적이며 복합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각각의 본질은 자기 동일적 가지성을 지닌 부서질 수 없는 하나의 벽돌인 것이다.
이 점들은 본질적 자체들이 모든 가능적 규정성에 대해 엄격히 중립적으로 있어야 하며, 항상 그렇게 남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인식 주체의 지성 속에 있을 때는 단일하거나 보편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취해질 때 그것은 어느 것도 아니다.
동물의 예를 들어보면, 그 자체로부터의 동물은 보편적이지도 단일하지도 않다.
“그래서 그것이 동물이라고 파악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동물이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더욱이 그것이 보편적이거나 단일적인 것으로 혹은 있을 수 있는 다른 무엇으로 파악되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에 의해, 동물이 바의 무엇 이외에 동물성에 우연적인 어떤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아비첸나는 말한다.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마성(馬性)의 정의는 보편성의 정의 밖에 놓이며, 보편성도 마성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성을 정의하려면 보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결국 마성 자체는 단지 마성일 뿐이다.”
이는 아비첸나의 본질에 대한 통일성의 우연성 및 실존의 우연성을 다룬 유명한 교설의 근원이다.
곧, 현실화된 하나의 가능자는 우연히 실존하게 된 하나의 본질이다.
다만 “처음인 분”만이 필연적이며 그래서 “그 분”만이 있고, 참으로 있다.
그리고 진리가 존재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처음인 분”은 그 자신의 필연성의 덕으로 진리이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실존에 관한 가장 사소한 규정조차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도 진리도 아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베로에스는 철학과 종교를 혼합한 아비첸나를 비난함.
본질과 관련해서의 일자성 및 실존의 우연성
147-
일자성은 하나라고 말해지는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실존할 수 없다.
그러나 일자성은 실체의 본질에 대한 정의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어떤 실체의 정의 속에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실체의 우연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본성에 있어서 있다는 하나의 우연자이다.”
본질에 관련한 존재의 이러한 외면성은 아비첸나가 있다는 하나의 우연자라고 말함으로써 의미하였던 것이다.
이제 좀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실존과 본질의 관계를 고찰해 보자.
어떠한 현실화된 가능자에게 있어서 실존은 본질의 불가분적인 부수물로 보였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실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가질 뿐이지 그것이 자신의 실존인 것은 아니다.
곧, 그것이 자신의 실존이 아닌 이유는, 만약 그것이 자신의 실존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본질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
여기서 다시 아비첸나의 순수 관념주의가 문제되면서 구체적 존재의 구성 요소들을 황폐하게 만든다.
필연적 실존으로서의 신
149-
실존이 일단 존재로부터 배제되면, 실존하는 본질이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아비첸나의 교설 속에서, '필연적 존재', 곧 그 자신의 필연성이 덕으로 있는 ‘그분’만이 또한 그 자신의 실존일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아비첸나의 '필연적 존재’는 어떠한 본질도 갖지 않는다.
신이 실존이라면 그분은 본질을 가질 수 없다.
신이 본질을 갖는다면 그분의 본질이 실존을 가질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은 '실존'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실존을 갖는 분으로서 실존할 것이다.
이러한 아비첸나의 교설 속에서 신 자신이 하나의 본질을 가지더라도 그분은 도무지 본질일 수 없다.
필연성에 불과한 실존
150-
질송은 아비첸나가 '필연적 존재'라고 부른 것이 참으로 실존이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 이외의 어떠한 다른 길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여기서 주안점은 아비첸나 자신이 ‘그분’은 있다고 말한 것이다.
과연 무슨 의미에서 그 말이 참인가? 필연적 존재는 있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 말은 참이다.
사실상 처음인 분은 의지이기 때문에 ‘그분’ 실존은 참이다.
그러나 처음인 분은 맹목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능자들은 처음인 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제1지성 속에 설립하는 나중의 일
또한 제1지성은 처음인 분의 덕으로서만 실존하기 때문에 그 자신을 그 자체로는 가능적인 것으로, 그분의 원인의 덕으로는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실존과 본질 사이의 최초의, 그러나 이미 다리 놓아질 수 없는 그런 간격이 있게 된다.
사유와 실존이 그분 안에서 엄격히 하나이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적 필연성이다.
하지만 각각의 현실적 실존은 본질이 자신의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가능성이 동시에 바로 자신의 필연성이 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실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분’필연성을 통해서 필연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연적 존재는, 존재인 한에서 필연성이다.
아비첸나의 ‘신은 실존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분은 실존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이 실존하지 않을 수 없고 사물은 신에 의해 필연적이므로 신과 사물들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실존은 필연적이다.
만일 이러한 논의가 참이라면 참된 실존은 본질에 대해 무관하며 참된 본질은 실존에 대해 무관하다.
이러한 선택이 최종적으로 실존으로부터 본질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비첸나의 세계 속에는 각각의 가능자가 궁극적으로 물체로 된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서 궁극적인 것은 결코 우연적이지 않다.
그러나 세계 속에서도 본질들은 그 자체로서는 순수한 가능자들로 항상 남는데 이 점은 바로 본질의 본질이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결정론적 세계와 자유로운 세계
153-
기독교 신학이 그러한 철학을 견대낼 수가 없었음.
에이피네 템피에르가 아베오에스와 아비첸나의 논제에 관한 기록에 서명했을 때 그는 단지 자유로운 하나의 신 아래에서 하나의 자유로운 하나의 자유로운 세계를 요구한 것뿐이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어떤 시간에나 우연히 발생할 수 있는 세계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신이 궁극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 세계에 자유가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실존도 세계에 없다면 거기에 자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적 우주 속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물체에 대해 구속 법칙인 모든 것이 신에게는 자유로운 일에 불과하기 때문
그런데 사람이 그 자체로서는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무관한 실존적으로 중립적인 본질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그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필연성의 거부: 오캄, 둔스 스코투스
155-
거의 모든 기독교 신학들이 자유를 바로 그들 자신의 세계의 헌장과 프로그램으로 간주해 온 듯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4세기 기독교적 사유가 행하려 시도했던 것은 그리스-아랍의 결정론의 견고한 장벽을 부수 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로 프란체스코 학파의 작업이었다.
예를 들어 오캄은 단순히 모든 본질을 폐기함으로써 신 안에 있는 본질을 없앰으로써 결정론을 부수려 했다.
어떠한 본질도 없다면 신은 자유롭다.
한갓된 개별자들과 신의 전능한 의지 사이에는 신적인 어떤 한계를 설정한 만한 것이 전혀 남지 않는다.
오캄은 이것을 철저히 잘 행했다.
또한 둔스 스코투스도 그리스-아랍의 필연성을 분쇄하길 원했고 다른 방식으로 수행했다.
곧, 아비첸 나의 본질을 폐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의 실존적 중립성으로부터 최대의 이점을 취함으로써였다.
스코투스주의자들의 본질 정의는 아비첸나의 정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비첸나가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곳에서 스코투스는 드물지 않게 “본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러한 본성은 그 자체로부터는 보편적이지도 단일적이지도 않으면서 그것은 보편성에 대해서도 단일성에 대해서도 중립적이다.
가능자로서의 존재
156-
그러한 본성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만약 이러한 물음이 그 본성이 소유하는 존재의 종류에 관한 것이라면 그 본성이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을 구분해보자.
존재는 순수하게 가지적이며, 그래서 어떤 무한한 마음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무한히 많은 가지적인 것들은 영원히 신의 마음에 현존한다.
이러한 가지적인 본성들 중의 하나는 무한히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신에 의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피조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아랍의 필연선의 장벽은 신의 본질의 절대적 무한성과 신의 의지의 절대적 자유라는 것에 의해 붕괴된다.
신이 창조한다면 자유로이 순한 사랑에서 그렇게 할 것이고 세계의 구조 속에 들어갈 이데아들을 선발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들은 “창조될 수 있는 것들”이 된다.
그들이 가능자들인 이유는 오직 신에 의한 불의의 피 조에 그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주의 안에서 신의 의지는 결코 본질들의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비첸나의 신과 달리 둔스 스코트스의 신은 자유롭다.
신의 의지에 의해 “창조될 수 있는 사물”로 현존할 때 가능자들로서의 그들의 존재는 어떤 있다를 갖는다.
본질의 발견 조건에 상응하는 각급의 존재
158-
신의 이데아들은 신 안에 있고 그래서 그들은 신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데아인 한 그들은 이데아로서의 그들의 존재를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참이며 둔스 스코투스는 자신의 사유방식에 밀리어 이데아들이 비록 신일지라도 이차적인 것으로서의 신, 즉 상대적으로 그리고 비유상으로만 신이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둔스 스코투스가 신과 신의 이데아들 사이에 도입한 미소한 구분은 이데아들로서의 이데아들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신일 수는 없다.
신의 이데아들에 관해 참인 것은 “창조될 수 있는 것들”, “가능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본성들”에 관해서 더 한층 명백히 참이다.
존재는 본질이 그 안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각각의 다양한 조건들 속에서의 본질 자체의 고유한 실재성에 불과하다.
이것은 본질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존재가 있게 되는 이유이다.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본질은 자신의 존재를 구성해 나가는 모든 우연자들에 의해서 스스로가 충실하게 구성되자마자 “있다” 말로써 자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있다.
스코투스주의 안에서 본질과 실존의 구분의 여지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항상 동일한 의미에서 말해지고 항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본질은 그것이 있는 만큼 실존하며, 본질의 실존은 그 본질에 속하는 존재의 양상에 의해 정확히 정의된다.
어떤 존재에서 본질이 정립되든지 간에 본질은 항상 실존보다 앞서면서 실존의 고유한 원인으로 정립된다.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서의 실존
161-
둔스 스코투스는 개별화의 문제를 이용하였다. ‘질료적 실체가 자신의 존재에 의해 개별화된다’는 누군가의 주장에서 그 존재는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궁극적인 현실이며 실존의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존의 존재가 그 자체로는 판명하거나 규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규정이나 구분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거부되었다. 실존 자체가 이미 본질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에 실존은 도저히 개별화의 원리가 될 수 없다. 그럴 경우 무엇이 규정을 하고 무엇이 규정이 되는가? 규정하는 요소는 명백히 본질이다. 신이 어떤 사물의 실존 이상이라면, 신의 본질이 어떤 사물의 본질 이상이기 때문이다. 본질들의 위계가 실존들의 위계를 규정한다면, 본질들의 위계는 존재론적으로 자기충족적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그 연쇄를 수립하기 위해 실존에 의존할 필요 없다. 자기가 있기 위해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갖는 본질은 그 자신인 바의 무엇의 덕분에 있다.
규정하는 조건들과 실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남는데, 본질이 존재와 동일하다면, 각각의 존재가 본질을 갖는 만큼 있음을 안다면, 실존은 존재를 말하는 또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그는 본질과 실존 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구분이 남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 구분이 어떤 방식에서는 우연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아비첸나의 표현과 공통점이 있다. 실존이 하나의 우연자라고 할 때 아비첸나는 실존이 실체에 우연히 발생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스코투스가 말한 실존이 참으로 우연적이지 않다는 것에서, 실존이 단지 본질의 특정한 양상이나 조건만 표현한다면, 실존은 자신에 상응하는 등급을 갖는 본질을 뒤따른다. 실존은 본질과 하나이고, 그래서 실존은 본질의 우연자라고 할 수 없다.
둔스 스코투스의 교설 속에서 존재의 관념은 본질과 실존 모두를 완전히 흡수하고 그래서 그것은 양자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에서 적용된다. 어떤 본질이나 그 자신의 실존을 선언하는데 그 실존은 그 본질에 있어 “있다” 이외의 것이 아니다. 스코투스적인 존재는 다수의 분리된 현실적 실존들에 의해 구성되지 않고 각각의 현실적인 존재가 다수의 형상적으로 구분된 본질들에 의해 구성되는데 이러한 각각의 본질이 그 자신의 존재에 부합하는 그러한 실존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 실존은 한 본질이 자신의 규정들의 완전한 연쇄로 장식됐을 때만 나타난다.
존재와 무 사이의 거리 : 유한(스코투스), 무한(토마스)
164-
토마스는 실존과 무 사이에 무한한 틈이 있어서 유일한 존재의 산출조차도 무한한 힘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적 실존이 무로부터 존재를 정립하는 거라면, 그것을 창조하는 힘은 그것의 결과에서 어떤 협력도 기대할 수 없고 그래서 그런 힘은 무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신과 피조물 사 이의 존재론적 거리는 무한하다고 하지만, 신의 본질이 무한한 반면, 사물의 본질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유한한 존재와 신의 존재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유한한 존재와 무 사이의 거리도 무한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존재가 유한하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이것의 거리는 유한 이상일 수 없다. 유한한 사물과 무 사이에 있는 거리는 무한하지 않다. 존재의 본질이 나타내는 존재의 양에 비례하고, 그 결과 본질 자체만큼 유한하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의 교설 속에서는 신이 유한한 존재들을 산출한다는 것이 그분의 전능성을 증명하진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유한한 결과를 창조하는 것이 무한한 힘을 지적하진 않더라도, 무로부터 그것을 창조하는 것은 하나 의 무한한 힘을 지시한다고 하였다. 이 점은, 문제되는 ‘있다가 실존이라면 ‘있다’와 ‘있지 않다'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므로, 반드시 그래야 한다. 반대로 어떤 사물에 있어 '있다'는 것이 그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이라면, 신과 무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지만 어떤 유한한 존재로부터 이것 자신의 무로까지의 거리는 이것 자신의 존재만큼 유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본질이 존재와 동일한 그런 형이상학적 세계 안에 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본질의 고유한 양상으로서의 실존
167
스코투스를 따를 때, 실존은 단지 본질의 고유한 양상 또는 본질의 정도(gradus)라는 것이 나타난다.
이점은 실존이 단지 본질이 갖는 규정의 궁극적인 정도에 있어서의 본질이라면 참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비첸나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의 실존자는 스스로의 궁극적 현실화의 상태 속에 있는 가능자이다.
그러나 한 존재가 현실적으로 있다면 그것의 현실적 실존은 그것의 본질의 고유한 양상일 뿐이다. 아비첸나에게 실존은 그것의 본질의 고유한 양상이기 때문에 본질의 우연자이며 그것의 무엇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연자”는 그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서의 어떤 다른 사물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우연자가 의미하는 바는 실존이 자신의 무엇임에 대해 낯설기 때문에 실존이 본질에 대해서 낯설다는 것이다.
신의 실존의 증명
167-
스코투스주의가 옳다면 본질이 실존보다 선행하게 된다. 본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본성인 반면 실존은 창조된 본성에 우연하게 발생한 하나의 양상이다. 이 실존이 하나의 본성에 우연히 발생하건 않건 본성은 결코 변경되지 않는다. 실존은 고유한 양상이므로 실존이 그 사물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스코투스의 신의 본질(곧 신인 바의 이 본질이며 그분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분의 실존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신의 본질의 고유한 양상들 가운데서 실존을 찾아야만 하고, 실존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무엇임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실존이 신의 본질에 속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정된 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하여금 이 본질이 되게 하고 그 결과로 그것을 독특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의 어떤 계열을 탐구하든지 그 계열이 모든 계열에 있어 처음이기 때문에 한결같은 처음이 아닐 수 없는 그런 어떤 처음인 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계열에서 최고의 영역을 차지하는 그분은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무한함을 뜻한다. 신의 본질로 하여금 이 하나의 본질이 되게끔 하는 것은 존재에 있어서의 신의 본질의 우위성과 무한성이다. 존재 일반의 필연적 속성의 고찰을 통해 그런 하나의 존재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으므로, 그분의 본질은 적어도 가능적이다. 만약 신이 가능적이라면 신은 실존한다.
신의 양상들의 계열
170-
신의 양상들의 계열에서 제일 먼저 본질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것은 하나의 양상이 아닌 그분의 모든 양상들의 원천이다. 따라서 그 본질은 본질의 계열에 있어 첫 번째이다. 이 첫 번째의 본질은 무한하다. 이 첫 번째이고 무한한 본질은, 바로 이러한 앞서는 두 개의 양상들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 “이 하나의 본질이 된다. 여기에서 무한성이 “이것임”보다 앞서온다. 앞서 각각의 본질이 그의 존재에 비례하여 실존할 권리가 있고, 각각의 본질은 자신의 모든 규정들을 수용하자마자 현실적 실존을 향유한다고 하였다. 신 자신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무한으로서 그분은 “이 하나의 본질이며 그와 같은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데, 다른 곳이라는 것 자 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신의 실존은 그분이 있는 방식, 곧 하나의 첫 번째이고 무한하며 이로 인해 개별화되는 본질이 그것에 따라 바로 그 자신으로 있게 되는 그런 고유한 양상이다. 스코투스주의의 “이것임”은 실존의 원인 이 아닌, 고려되는 본질이 이제 실존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그래서 사실상 본질은 실존한다. 신 안에 혹은 유한한 사물들 안에 “이것임”이 있다면, 실존은 하나의 개별화된 본질에 속하는 존재의 양상이다. 신의 경우처럼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그렇게 있든지, 아니면 피조물들의 경우처럼 다른 것에 의해 그렇게 있든지 간에, 충실하게 개별화된 본질들은 그들의 본래적 권리로서 실존한다.
마이로네스의 프란시스 및 안토니오 트롬베타가 보는 신의 실존
172-
스코투스주의의 창시자인 마이로네스의 프란시스는 “실존이나 실재의 양상”이라고 부르는 바의 것을 말할 때 그 것을 신의 본질의 양상들 중에 세 번째(무한성, 유일성 다음으로)로 놓는다. 또 다른 스코투스주의자 안토니오 트롬베타는 적어도 실존이 신의 본질의 무엇임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본질이 그것인 바의 무엇이라면, 그 것은 그 자신의 실존일 수 없다. 기독교인이었던 트롬베타는 신이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는 아비첸나의 주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가 신을 하나의 본질로 정립해도, 그는 그분에게서 실존을 부인할 수 없다. 실존적으로 중립적인 아비첸나의 본질 관념을 수용한다면 그는 신의 실존이 그분의 본질의 무엇임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무한성 자체는 하나의 양상이다. 그런데 실존보다도 본질에 대해 훨씬 더 내적인 무한성이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양상이면서 본질의 무엇임에 속하지 않는다면, 본질로부터 훨씬 더 떨어진 어떤 것(실존) 은 더 큰 이유로 고유한 양상일 뿐 무엇임에는 속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스코투스가 실존에 관해 인정한 내용과 같다. 있다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본질이 되는 그런 신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이다. 만약 아비첸나 자신의 견해와 달리 신이 아비첸나적인 하나의 본질이라면, 현실적 실존은 엄격히 하나의 우연자인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우연자로서 그분에게 우연히 발생하게 된다. 개념들이 실재의 이미지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개념들이 그들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실재를 만들 때 불건전한 어떤 것이 형이상학의 영역 안에 있게 된다.
본질의 실재성과 실존에의 적합성의 동일화
174-
프란시스 수아레즈는 <형이상학의 논쟁들>에서 형이상학적 인식에 관련된 문제 자체(res ipsas)를 말한다. 문제들 중 첫 번째 것은 존재(being)이다. 현재분사로서 ens(있는)는 sum(나는 있다)에서 파생된다. '나는 있다가 '나는 존재이다'를 의미하듯 '어떤 이가 있다’는 ‘어떤 이는 존재이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ens라는 말이 왜 현실적 실존(동사 sum이 지시하는 바로 그 실존)을 부여받은 어떤 것을 지시해 온 것같이 보이는가에 대한 이유다. 일차적 의미의 확장 후에 ens는 실존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주체들과 더불어 한갓 실존을 소유할 수 있는 것들도 지시하게 되었다. “
사실상 “존재"라는 단어는 실존하는 존재의 개념과 가능적 존재의 개념이라는 구분되는 두 개념을 지시하지 않는다. 수아레즈에 따르면 “ens는 명사로 사용될 때는 현실적 실존을 추상의 방식에 의해 고려하지 않으면서, 하나 의 실재적 본질을 갖는 어떤 것을 지시, 분사로 사용될 때는 실재적 존재 자체(실재적 본질, 현실적 실존 모두 갖는)를 지시” 한다.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존재가 가능적, 현실적 존재 모두를 포함하는 존재 일반의 한 영역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는 존재 일반의 여러 경우들 중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경우에 취해진 존재 일반이다.
본질이 “저 사물은 무엇인가?”의 물음에 답을 주는 것이라면, 본질은 “무엇임”이라는 이름을 취한다. 그것이 현 실적 실존이 현실적 존재에게 부여한 바의 것인 한에서 그것은 본질(essence)이라는 이름을 취한다. 그래서 실재 적 존재는 그의 원인에 의해 현실화되고,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으로 이끌어진 하나의 본질이 된다.
본질과 실존의 구분의 세 가지 교설
179-
수아레즈는 본질과 실존 간에는 실재적 구분, 양상적 구분, 이성에 의한 한갓된 구분이 있다고 하였다. 본질은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않는 반면에 현실적인 것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본질에 대해 그것이 하나의 참된 현실적 존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본질이 현실적으로 있거나 실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아레즈는 존재를 본질과 동일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모든 현실적 존재들을 단순히 많은 충실히 현실화 된 본질들로서 파악했다. 그는 현실적 실존이 이미 실존하는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덧붙일 수 있는지 의아해 하는 데, 그런 물음은 불합리하다. 여기서는 실존이라는 용어의 정의로부터 실존 자체가 하나의 사물로 파악되어 있고, 그 결과 실존하기 위해 이미 실존하는 사물이 그 자신인 바의 무엇 이상으로 또 하나의 어떤 사물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수아레즈도 현실적 본질을 단순한 가능적 본질과 다르게끔 하는 것이 실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는 유한한 어떤 본질도 그 자체로부터 실존하지 않고 신의 창조 행위에 의해 그의 실존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에게 실존은 실재성의 최고의 표시이다. 따라서 그는 실존이 실재라고 적절히 불릴 수 있는 것을 구상하는 하나의 고유한 형상적 요소라고 선언한다.
실존은 그로 인해 하나의 실존자가 현실적으로 실존하게 되는 형상적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주어진 실존자들의 속성이다. 하나의 가능적 본질이 있다면 신이 그것을 창조한다. 신은 그 본질을 창조하였다. 그 본질에 있어서 신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꼭 같은 것이다. 수아레즈가 간과한 것은, 신이 하나의 본질을 창조할 때 그분은 어떤 가능적 본질이라도 자신의 본래적인 권리로 향유하고 있는 그런 본질의 현실성을 그 본질에게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이 그 본질에 부여하는 것은 실존의 현실성이다. 그 자체로 취해질 때 사람의 본질은 본질로서 충분히 현실적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의 본질이 본질인 한에서의 그의 현실화를 통해 현실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
실재적 구분에 대한 수아레즈의 비판
184-
수아레즈는 스코투스주의자들이 어떤 종류의 실재적 구분에 대한 옹호자들이라고 간주한다. 아비첸나와 같이 그 들은 실존을 본질에 따르는 부가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아레즈에게 본질에 있어서 자신의 본질의 현실을 현 실적으로 발휘한다는 것과 실존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본질을 아직 자신의 현실을 발휘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순수한 추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실존하는 본질을 그의 실존으로부터 추상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그러나 현실적 실존과 현실적이며 실존적인 본질 사이에는 참으로 어떠한 구분도 없다.
수아레즈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는 명제가 그 본질이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한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 어떤 사람이 한 사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에 의해 그 사물이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데 이 경우에 “실존한다”는 말이 그 사물 자체에 적용되는 것 외에 무엇에 적용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실존에 적용되지 않는다.(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적용돼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프리오리한 논거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증명하는 것은 적어도 수아레즈는 자신이 존재 관념 속에 실존 자체를 위한 어떤 여지도 마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적 본질”의 현실성이 실존적 현실성이 되기 위하여 하나의 실존 적 현실을 요구하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이다. 수아레즈에게는 본질이 존재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볼 수 없는 문제였다. 수아레즈는 가능적 본질들은 단순한 가능자들인 한에서 실재적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신은 그들에게 어떤 영원한 존재를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그 자체로부터 하나의 본질이 하나의 가능자라면 그리고 하나의 가능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의 현실화의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능적 본질의 이러한 실존적 무는 우리로 하여금 그 현실적 실재성의 내적 원인을 위해 바로 본질의 계열 밖을 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수아레즈의 상대자들이 실존은 우연한 방식으로 유한한 본질들에만 속하고 그 결과로 본질은 실존과 참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하였는데, 현실화된 본질도 마찬가지로 우연적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화의 원인이 여전히 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창조된 존재들의 우연성은 본질과 실존의 구분에 의존하지 않고도 보호될 수 있다. 이 점에선 수아레즈가 옳다. 존재가 그가 말하는 바대로의 것이라면, 유한한 존재의 우연성이 보호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그의 가능적 본질들은 영원한 존재들이 아니며 그의 현실화된 본질들은 참으로 창조된 존재들이다. 이러한 두 개의 가능적인 피조자 관념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옳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실존 배제의 귀결: 본질 형이상학
187-
우리가 이미 실존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는 한 어떻게 우리가 실존으로부터 본질을 구분 지을 수 있겠는가? 수아레즈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마치 실존이 어떤 무엇일 수나 있는 듯이 실존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는 존재를 그 것의 본질과 동일화했기 때문에 그는 존재 안에서 어떤 있다(만약 이것이 있다면 이것은 본질도 사물도 아닐 것이다.)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것은 수아레즈가 왜 실존을 보고 있을 때도 실존을 알지 못하는가의 이유이며, 그런 이유로 이상한 그의 형이상학적 존재 관념이 성립한다. 그의 교설 속에서 비존재 자체의 현실화는 바로 존재의 기원이며 존재에 관한 철학적 설명이다. 그는 실존을 형이상학의 탐구대상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본질 형이상학을 확산케 했다.
우리가 하나의 존재를 실재적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단순히 가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그것을 가능적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인 실존을 배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서 실존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