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어를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연구 분야나 관심 분야를 소개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사람 만날 때마다 전공 분야가 바뀌는 준-사기꾼들이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허영심 가득한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놈들은 “오는 길에 귀여운 고양이를 보았다”고 말하면 될 것을, 고양이의 계-문-강-목-과-속-종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마치 분류학에 정통한 사람인 듯한 냄새를 풍기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단지 정돈 안 되고 정신 산만한 사람이 두서없이 자기 전공 분야나 관심 분야의 핵심어를 나열하면, 마치 다재다능한 척, 르네상스 지식인이라도 되는 척 뽐내는 준-사기꾼이나 허풍선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군더더기 없이 전공 분야나 관심 분야에 대해 소개하더라도 상대방이 해당 분야가 어떤 것인지 금방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의 철학과 사회과학의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면,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한 분과이니 그냥 사회과학의 철학으로 묶이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꼭 나온다.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한 분과인 것은 맞는데, 경제학의 철학과 사회과학의 철학은 상당 부분 겹치지 않기 때문에 경제학의 철학이 사회과학의 철학에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 그런지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다 보면, 이야기를 듣던 사람은 눈이 풀려 있거나 자꾸 다른 곳을 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설명하다 중간에 멈추면 상대방을 무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하던 말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전공 분야나 관심 분야의 분류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가령, 떠벌떠벌 말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이 “나는요, 일단 철학 전공이구요, 그 중에서 과학철학 전공인데요, 과학철학도 프랑스철학 쪽과 영미분석철학 쪽이 있는데 분석철학 쪽이구요, 경제학의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요새는 계량거시경제학 쪽에 관심이 있어서 박사학위논문은 그 쪽으로 쓰려고 하는데, 인과를 다루려구요. 인과는 형이상학의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인데...”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간단히 말하면, 아직 박사학위도 없고 학위논문 작업에서 진척된 것도 없는 주제에 떠벌떠벌 하는 것인데, 하여간 철학, 과학철학, 프랑스철학, 분석철학, 경제학의 철학, 계량거시경제학, 인과, 형이상학까지 여덟 단어나 나왔으나,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거의 없다. 이런 말을 듣고 멍청이들이 속아 넘어가도 문제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의심해도 문제다. 해당 분야를 분류 체계로 정돈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피할 수 있다.
철학 > 과학철학 > 경제학의 철학 >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 (분석철학)
형이상학에서 논의되는 인과에 관한 논의를 잘 모르면 위와 같이 한 줄만 적으면 될 것이고, 인과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도 웬만큼 안다면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 > 과학철학 > 경제학의 철학 >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 (분석철학)
철학 > 형이상학 > 인과
이러한 제시 방식을 응용하면, 경제학의 철학과 사회과학의 철학이 어떤 식으로 다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직관적인 정보 전달을 할 수 있다. 가령, 관심 분야를
철학 > 과학철학 > 경제학의 철학
철학 > 과학철학 > 사회과학의 철학
이라고 제시하면, “철학 > 과학철학 > 사회과학의 철학 > 경제학의 철학”이라고 제시하지 않은 점에 근거하여 두 분야가 포함 관계가 아닐 수 있겠다고 추론하게 만들 수 있다.
만약에 연구가 잘 되어서 연구 분야가 확장되었다고 해보자.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를 연구하다가 계량경제학사에도 손을 대었고, 1940년대 계량경제학의 태동기의 인과 관련된 논의도 손을 대서 경제학사 논문도 쓰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연구 분야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철학 > 과학철학 > 경제학의 철학 > 계량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
역사학 > 과학사 > 경제학사 > 계량경제학사 > 1940년대 > 인과
이렇게 나타내면 특별히 많은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두 연구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 내적인 연관성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 연구가 확장되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연구가 잘 된다고 해도 너무 떠벌거리면 재수 없어 보일 뿐 아니라 멀쩡한 성과도 다른 사람에게 의심받을 수 있는데, 위와 같이 제시하면 연구 성과가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었는지 짐작하기 쉽게 보이기 때문에 신뢰도도 잃지 않을 수 있다.
(202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