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8

모나지 않게 비판하기



어떤 과학철학 선생님이 다른 학회 가서 했던 논평과 관련된 목격담을 들었다. 동료 대학원생에 따르면, 그 학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연구라고 발표하여 그 대학원생이 보고 화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걸 보고서도 과학철학 선생님은 매우 정중하게 논평하여 대학원생은 선생님의 인격에 내심 놀랐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발표자가 논평에 “그러면 연구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라고 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나 식견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해당 분야의 필요 이상의 포용성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해당 발표는 연구로써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분야의 정상적인 연구에 대하여 다른 분야 전공자가 비판한다면, 웬만큼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가 다른 분야 전공자의 비판을 가볍게 받아치는 것이 정상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식으로 전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휙 훑어보는 정도로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를 이기기 힘들다. 전공자가 지나가는 아저씨의 논평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화를 낼 정도라면 해당 작업은 정말로 연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혹시라도 그 정도의 것이 연구로 인정받을 정도라면 해당 분야는 유사 학문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발표자가 논평에 화를 내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연구 같지도 않은 것을 연구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연구자가 아니므로 발표자가 연구자의 소양을 갖추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학철학 선생님은 발표자가 화가 날 정도로 발표 내용의 결함을 분명하게 전달하면서도 제3자가 듣기에 거북하지 않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의사를 전달했다는 점이다.

건너 건너로 듣기로, 분석철학 선생님들 중에는 어떤 내용을 비판할 때 인신 비방만 안 했지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표현을 쓰는 분들이 가끔씩 있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험한 표현을 학술대회 때 공방을 주고받을 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논문에 명시적으로 남기기도 한다. 철학 이외의 다른 분야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중에는 기존 논문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논문이 게재되었다는 것이 해당 학계의 비극이며 수치라는 식의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상대방이 말을 아예 못 알아듣는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표현을 써야 할까?

글쓰기 강사 이강룡의 강의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강룡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쓴이 혼자 붕 떠서 글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 쓴다면 사랑에 대해 피상적으로 전달할 뿐이다. 독자가 글을 다 읽었을 때 그 글이 전하고자 한 것이 사랑이라고 떠올릴 수 있어야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독자에게 더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다.

비판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연구가 아니라고 직접 쓰면 읽는이는 얕은 분노를 느낄 뿐이다. 정중하면서도 꼼꼼하고 건조하게 해당 내용을 비판해서 읽는이가 비평을 다 읽고 나서 ‘아, 이것은 연구도 아니구나’ 하는 깊은 좌절을 저절로 느낄 수 있어야 좋은 비판이 아닐까? 아마도 과학철학 선생님이 다른 학회에서 했던 논평이 그러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철학과 학생들의 글쓰기 교육에는 상대방의 논증을 비판하는 것 이외에도 비판 내용을 모나지 않게 표현하기도 포함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2024.01.08.)


2024/03/06

[참고 문헌] 언어철학 - 명제 태도 (영어 선집)



A.C. Anderson and J. Owens (eds.)(1990), Propositional Attitudes: The Role of Content in Logic, Language, and Mind (Stanford: CSLI).

(2024.03.12.)


2024/03/04

석사학위 논문에 관한 논평을 하다 든 생각



전공자들끼리 발표하는 모임에서 발표 내용에 대해 비평할 때, 다른 사람들이 비평하는 것과 내가 비평한 것을 비교해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거칠게 말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거칠게 말한다는 것은, 같은 내용인데 강한 표현을 쓴다는 것도 아니고 인신 비방 같은 것을 한다는 것도 아니다. 논평하는 범위가 다른 사람보다 넓고 논리적인 수준이 약간 떨어진다는 것이다. 가령, 다른 사람들이 어느 부분의 논리적인 연결이나 흐름에 대해 논할 때, 나는 그보다는 큰 단위에서 어느 부분부터 어느 부분까지 버리라고 한다든지, 어느 부분은 떼어놓고 석사학위 받은 다음에 생각하라고 말하는 식이다.

나는 왜 이렇게 거칠게 말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가 대학원에 오래 다니기는 했지만 딱히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 데 소질이 없어서다. 안 배워도 되는 게 있고 배워도 안 되는 게 있는데, 나는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하려고 노력하는 데 잘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어차피 큰 틀에서 다 뜯어고쳐야 하는 판이라 지엽적인 부분의 논리적인 오류를 잡는다고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인 경우다. 3분의 2쯤은 떼어내고 3분의 1을 가지고 잘 추슬러야 하는 경우라면, 굳이 떼어낼 부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해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뭘 몰라서 따로 떼어버릴 부분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똑똑하거나 적어도 석사학위를 순탄하게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논평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순조롭게 석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남들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 사람이 가져온 것의 원형을 그대로 두면서 그 상태에서 뭔가 미세하게 조정하여 결과물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나처럼 전혀 순조롭지 않게 석사학위를 받은 지난 사람은, 그 못지않게 험한 과정을 겪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겪을지 안다. 그러니 포기할 부분은 빨리 포기하고 남은 부분을 추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게 일종의 생존 편향일 수 있다. 전투기든 폭격기든 비행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무사히 비행장에 도착했다고 치자. 회피 기동도 잘 하고 하여간 임무 수행을 잘 하고 돌아온 사람들보고 정비사한테 원하는 바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꼬리 날개가 어떠니 하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치명적인 부위를 피격당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나처럼 격추될 뻔하다가 가까스로 비행장에 돌아온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엔진 쪽 장갑은 무조건 두껍게 해주세요. 네? 힘들다구요? 안 돼요! 안 그러면 죽어요!”

노벨상 수상자들은 그들의 지도교수도 노벨상 수상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노벨상 받은 사람이 잘 가르쳐서 학생도 노벨상을 받는 건지, 아니면 노벨상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라 노벨상 수상자의 지도 학생이 되는 건지는 모른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건 그들 세계의 일일 뿐이다. 석사학위를 받는 것도 어려운 학생을 돕는 일은 그 못지 않게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학생은 학위 과정을 거치며 학문적으로 다 죽어버리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을 도울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좋은 석사학위논문을 쓸 학생이 더 좋은 논문을 쓰게 할 능력은 아직 나에게는 없는 것 같지만, 석사학위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을 학생이 덜 고생하고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지침 정도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내가 어떻게든 가까스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면, 내가 그러한 경험을 살려서 위기에 처한 박사과정생이 숨통을 트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자면 일단 내가 박사학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

(2024.01.04.)


2024/03/03

이런 무당이 있다면



내가 개신교 신자이기는 하지만, 이런 무당이 있다면 찾아가 보고 싶다.

언젠가 무당이 자기 뜻과는 달리 교회에 호의를 베푼 적도 있다. 어떤 가족이 세례명이 요한인 부친이 죽자 배교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가족 중에 한 명이 병들자 멀리서 용한 무당을 불렀다. 무당이 황홀 상태에 빠져 말하길, “나는 요한의 영인데, 너희들이 신앙을 버리고 나를 위하여 기도를 도무지 하지 않기에 편히 쉴 수가 없구나. 즉시 회개하라"고 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귀신을 섬기는 제구(祭具)들과 위패를 내던지고 묻거나 태웠고, 아내는 참회자로 교회에 돌아오고 아들들은 다시 세례준비자가 되었다.

세실 허지스 외,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2024.01.03.)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