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4

소개팅 1



이번 주말에 소개팅을 한다. 처음 하는 소개팅이다.

주선자는 연구실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동료 대학원생이다. 주선자는 지난 학기 자신의 친언니를 나에게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나에게 지난 학기는 망해가던 학기였고 그래서 내가 소개팅을 두 번 미루었는데 그 사이에 주선자의 친언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냥 뭐 그런가보다 이런 일이 나한테 한두 번이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번 학기에 동료 대학원생이 또 소개팅을 주선했다. 이번에는 친언니의 직장 동료다. 자세한 정보는 모르고 다만, 팔다리가 길고 피부가 약간 검은, 러문과 출신의 공무원이라고만 알고 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응원형]

“화이팅, 잘 하세요!”, “잘 될 거예요!”

[조언형]

“부담 가지지 말고 친구를 만들러 나간다고 생각하세요.” (한 번도 소개팅에 나가 본 적이 없는 대학원생)

“부담 가지고 나가. 이건 너한테 천재일우의 기회다.”

[주의-경고형]

“소개팅 나가서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말아요!”

“옷 그렇게 입고 나가면 여자가 도망가요!”

“선배는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말도 너무 많아요. 소개팅 나가서 그러면 안 돼요!”

“형, 꼭 모자 쓰고 나가.”

[감탄형]

“와!”, “우와!”, “오!”

[음모론자]

“주선자분이 언니하고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주선자가 너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관람형]

“소개팅 구경 가도 돼요? 와, 정말 재미있겠다!”

“◯일 ◯시 ◯◯◯◯에서 하면 박◯◯◯ 언니랑 같이 구경 가도 돼요?”

[생계형]

“공무원? 와, 그 소개팅 내가 하고 싶다.” (여자친구가 있는 대학원생)

(2013.10.04.)


2014/07/04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희한한 접근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은 학생들이 인문학 전공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인문학 전공을 기피하는 것은 인문학 전공자의 취업률이 다른 학문 전공자의 취업률보다 낮기 때문이다. 인문학 전공자의 취업률이 낮은 것은 기업에서 다른 전공자보다 인문학 전공자를 상대적으로 덜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시절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학만 나오면 기업에서 다 데려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업에서 다른 전공자보다 별다른 이점이 없는 인문학 전공자를 뽑을 이유는 없다.

과거에는 전공과 무관하게 취업이 척척 되었기 때문에 학과가 유지되었다. 학생들이 비-인기학과에 입학해서 배우는 것도 없이 등록금을 척척 내놓고는 알아서 취업을 했기 때문에 학과 유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경제 상황이 바뀌고 나서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 왔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다.

문제의 본질이 단순한 만큼 대책도 단순하다. 정부에서 부실 대학을 정리하고 예산을 돌려서 학문 후속 세대를 유지할 예산을 지원하면 된다. 하다못해 정부에서 번역 사업만 마음먹고 추진해도 괜찮은 대학의 인문학 전공자는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매우 희한한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이유로 (i) 인문학이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느니 (ii)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느니 (iii) 대중과 유리되었다느니 하는 것을 꼽는다. 인문학의 위기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은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있으니 자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헛소리인가 보자.

(i) 인문학이 현실을 다루지 않아 위기에 처했다?

도대체 인문학이 다루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게 무엇인가. 김어준의 말을 빌려보자. “나는 그 동안 철학을 우습게 보아왔다. 내 삶의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철학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이 생각은 강신주를 만나고 바뀌었다. 강신주가 하는 철학이 진짜 철학이다.” 삶의 문제라는 게 무엇인지 들어보면, 힘들고 어렵고 짜증날 때 기분 좋게 말해달라는 것이다. 그런 거 하라고 철학이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의 인문학이 외국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현실과 괴리되어 힘을 잃었으며, 그래서 ‘한국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존의 인문학이 해결하지 못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무엇인가. 막상 그런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런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면서 “한국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당위만 앞세우니 논의는 공허할 수밖에 없고, 논의가 공허하니 당연히 마땅한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마땅한 결론이 나오지 않으니까 인문학이 현실과 괴리되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우긴다. 이렇게 무한 반복이다.

(ii) 인문학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아서 위기에 처했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문학으로 드는 예가 문화 콘텐츠다. 문화 콘텐츠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개소리하고 눈 먼 돈을 벌자는 것이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문화 콘텐츠 관련 서적에서는, 혈액형 성격분류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개소리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돈이 되고 이를 이용해보자고 했다. 문화 콘텐츠가 인문학의 살 길이라고 하는 사람들 수준은 대체로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iii) 대중과 유리되어서 위기에 처했다?

인문학의 사회적인 저변이 넓어져야 할 필요는 있다. 이는 인문학 뿐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의 본질은 아니다. 어느 분야든 전문 분야라면 연구 분야가 세분화되어 비-전공자에게 진입 장벽이 생기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개나 소나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의 분야라면 전문성이 결여된 분야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대중과 유리되어서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는 인문학 전공자들은 실제로도 자기 전공 분야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관리 안 되는 학교에서 등록금만 갖다바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불쌍한 사람들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교수들도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사회를 탓하기에 앞서 자성해야 한다면서 인문학이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느니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느니 대중과 유리되었다느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점이다. 꼭 연구도 안 하고 수업도 제대로 안 하는 교수들이 그런 허황된 소리나 나불거리고, 그런 헛소리는 꼭 언론에 나온다. 그런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 멋모르는 학부생들은 맛이 가고, 맛이 간 학부생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헛소리를 전파한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교수나 학생을 보면 사람들이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할 리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공허한 소리나 하고 앉았으면 무슨 수로 비-전공자들이 납득하게 만들겠으며 정책결정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2014.05.31.)


2014/06/20

성년의 날에 먹은 순대국밥을 먹은 후배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입학하지만 현실을 마주하고 좌절한다.

성년의 날에 장미꽃과 향수와 또 다른 무언가를 받을 줄 알았으나 그 중 단 한 가지도 받지 못했던 여학생이 있었다. 성년의 날이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며 동아리방에 들어오니, 넓은 동아리방에 선배 한 명만 덜렁 있었다. 선배가 물었다. “밥 먹었냐?”, “안 먹었는데요.”, “밥 먹으러 가자.”

선배가 후배를 데려간 곳은 3대째 순대국밥을 만들어왔다는 유서 깊은 순대국밥집이었다. 순대국밥을 좋아하는 선배였다. 그날 그 여학생은 알게 된다. 아, 인생이 별 게 없구나, 하고.

그날 먹은 순대국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 그 여학생은 전 세계를 떠돌았다. 그러다 호주에서 네덜란드 남성을 만나 7년 만에 결혼했다.

성년의 날에 후배에게 순대국밥을 먹인 선배는 나였다. 후배는 그 때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식 뒤풀이에서 후배는 그 날 내가 순대국밥에서 고기며 간이며 순대며 하나씩 젓가락으로 꺼내서 새우젓에 찍어먹은 후 밥을 말아먹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나는 한참을 웃었다.

(2014.04.28.)


2014/05/07

이야기가 엉성한 <맨 프럼 어스>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가 공연한 <맨 프럼 어스>를 보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이야기가 엉성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작품 각색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어서 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영화 내용도 연극과 똑같았다. 각색의 문제가 아니라 원작의 문제였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주인공 존 올드맨은 10년 간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종신교수직을 거절하고 갑자기 이사간다고 한다. 동료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1만 4천 년을 살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채지 않도록 10년 마다 신분을 바꿔 이주하다 보니, 함부라비 밑에서도 살아보고 부처도 만나보고 하여간 역사 곳곳에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신약성서에 예수로 기록되었음을 털어놓는다. 개그콘서트 <달인>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점은, 주인공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나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데도 그의 동료 교수들이 죄다 얼빠진 얼굴로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동료들이 괜히 화를 낸다든지 슬퍼한다든지 총을 꺼낸다든지 하는 장면도 있다. 죄다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 그의 동료들은 주인공이 말한 경험이 현재까지 밝혀진 지질학이나 역사학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주인공의 주장이 입증되지 않는다. 그 정도 이야기는 일정 정도의 상식만 있으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주인공이 어떠한 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골동품점에서 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자기가 1만 4천 년을 살아왔음을 입증하려면 기존 이론과 부합하는 증언이 아니라 기존 이론이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증언을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 무덤에 관한 기사를 사실로 믿지 않고 설화를 적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발굴 결과 상당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사기』의 사료적 가치가 입증된 바 있다. 진시황릉에 수은으로 강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진시황릉 주변 토양을 검사한 결과 수은 농도가 다른 지역의 몇십 배 높게 측정되었다든지,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다든지 등의 사례는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기존의 역사 이론에서는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것이었다.

이를 응용한다면, <맨 프럼 어스>의 개연성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을 주인공이 증언하는 장면을 넣는다면 어땠을까? 가령, 동료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했으나 아직 학계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주인공이 그 곳에서 어떤 유물이 출토되었을 것인지 말해서 그 고고학자를 놀라게 한다든지, 전승되지 않은 기록의 일부를 말해서 기존의 연구에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한다든지 등의 장면을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상의 역사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에서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의 반론도 어설프다. 주인공의 주장이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주인공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도 상식에 안 맞는다”고 하고, 언제부터 자신이 예수라고 생각했냐는 물음에 주인공은 “당신은 언제부터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했냐?”고 반문한다. 이런 어설픈 반론에 박사나 교수라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니 말이 되는가?

나는 이 영화의 소재가 흥미롭다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구성은 그다지 치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맨 프럼 어스>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어떤 평론가는 “미신숭배자들의 신성을 파괴하는 데서 쾌감과 동력을 얻어 굴러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영화에서 제시하는 바는 그냥 상식선에 있다. 성서에는 고대 사회의 여러 신화가 섞여 있고 이교도적인 요소가 혼재하니까 성서를 글자 그래도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든가, 예수의 메시지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주장인가? 사정이 이러한데, 네이버 영화란에 기자-평론가들은 “꽉 짜인 구성”이네 “논리적으로 착착 꿰어지는 수다가 황홀하”네 어쩌네 한다. 종교만 까면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한 평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평론가라고 한다면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2014.03.28.)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