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

MBC <교실 이데아>의 밑장빼기 - 국제 바칼로레아 홍보 방법



만약에 내가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이고, 뒷광고인지 앞광고인지는 모르겠으나 IB(국제 바칼로레아)를 홍보하는 방송을 만들라는 지시가 위에서 내려왔다고 해보자. 수능이 아무 쓸모 없이 학생들이나 들볶기나 하는 것이고 IB가 그 대안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교양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세련된 광고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MBC <교실이데아>라는 프로그램이 선택한 방법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수능 문제를 풀게 한 뒤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당 방송에서는 글쓰기 작가, 영화 감독, 아나운서 출신 변호사, 베스트셀러 작가 등 한국어 능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수능 국어영역 문제를 풀게 하고, 그들이 100점 만점에 50점 내외를 받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카이스트 출신 한국 최초의 우주인,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 카이스트 석사과정생, 수학과 교수 등에게 수능 수학영역 문제를 풀게 하고, 그들이 100점 만점에 55점 내외를 받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 수능 문제가 전문가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을 휩쓸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롬멜한테 사관생도 입학시험 때 보게 하는 체력 시험을 보게 한다고 해보자. 아무리 롬멜이라도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니 합격선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보고, “롬멜도 통과하지 못하는 체력 시험, 과연 우수한 지휘관을 뽑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다면 그게 정상인가? 그런데 그런 게 공영방송에서 나온 것이다.

해당 방송에서 국어영역 문제를 푼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강원국 작가는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국어와 관련된 시험을 본 것은 1982년도에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당시 국어 만점이었다고 한다. 변영주 감독은 이화여대 법학과 출신으로 학력고사 세대인데 국어를 만점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수능의 무용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학력고사의 유용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학력고사 국어 고득점자들이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으니, 이를 두고 학력고사 세대의 교육법이 우수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이, 태어나서 처음 수능 문제 풀게 해놓고 절반 정도 맞으니까 수능이 쓸모없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겠다.

수학영역의 경우는 더 가관이다. 수능 세대인 서울대 수리과학부 서인석 교수는 모의고사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고 암산만으로 모의고사 만점을 받은 이력이 있다. 다른 연구원이나 교수들이 평균 55점 내외를 맞는 와중에 서인석 교수는 97점을 맞았다. 그러자 여성 사회자는 “정작 실생활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수능 수학 문제들이 많다”고 바람 잡았다. 실생활에 수능 수학 문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애초에 전문가들한테 수능 수학문제를 풀게 하지 말 것이지, 예상을 깨고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나오니까 수능 수학문제가 실생활에 필요하네 마네 한다. 이건 화투판에서 밑장 빼다 걸려놓고 “어차피 도박은 불법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남성 사회자는 여성 사회자를 거들며 “서울대 수학과 교수보다 수능 수학 만점자가 수학을 더 잘 한다고 보아야 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롬멜이 40대인데도 불구하고 사관생도 입학 때 보는 체력 시험 기준을 크게 넘겼고 해보자. 그걸 두고 “그렇다면 롬멜 장군보다 체력 시험 성적이 더 뛰어난 학생이 지휘를 더 잘한다고 해야 할까요?”라고 말한다면, 그게 정상인가?

방송에서는 “수학 명사 중에는 수능 시험을 보지 않고 대학에 진학한 전문가들도 있고 현직에서 아무런 지장 없이 연구 활동 중”이라고 했다. 과학고 다니다 수능 없이 카이스트에 입학한 수학과 교수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방송 제작한 사람들은 양심을 당근마켓에서 중고로 팔았나?

IB를 팔아먹으려고 수능이 세상 쓸모없는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아무리 시청자들을 무지렁이 개돼지로 보아도 정도껏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종편 프로그램에서 하는 간접 광고보다 더 질이 나쁘다. 종편에서 하는 간접 광고는, (i) 중장년층이 걸리기 쉬운 병을 소개하면서 (ii) 너 그러다 칵 죽는 수가 있다면서 시청자들이 겁먹게 만든 다음, (iii) 하얀 가운 입혀놓고 병풍처럼 앉혀놓은 의사나 한의사들의 입을 통해 식품을 만병통치약처럼 과장하는 패턴으로 구성된다. 이 경우 심한 과장이 있을지는 모르나 쌩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성인병은 중장년층이 걸리기 쉽고, 그 병에 걸려 정말로 칵 죽는 사람들도 꽤나 있으며, 식품에는 아주 미약하더라도 약효가 있기도 하다. MBC <교실이데아>에서 수능과 IB를 다룬 방송분은 그 정도의 성의나 정직성도 없는 것이었다.

* 링크(1): [MBC 교실이데아] 국어 전문가들이 도전하는 수능 국어 영역 (2024.04.21. 방송)

( www.youtube.com/watch?v=VXYDnM36twE )

* 링크(2): [MBC 교실이데아] 전문가들의 국어 시험 결과는?! 문해력을 기르지 못하게 하는 현 수능의 문제 (2024.04.21. 방송)

( www.youtube.com/watch?v=o1LFFzv4I9w )

* 링크(3): [MBC 교실이데아] 최고의 소설가도 어려운 수능 문제의 참담한 현실 (2024.04.21. 방송)

( www.youtube.com/watch?v=fMf97YhrH1E )

* 링크(4): [MBC 교실이데아] 암산만으로 모의고사 100점? 수학 절대 강자들의 수능 도전 (2024.04.21. 방송)

( www.youtube.com/watch?v=ZWylMO8ZjaI )

* 링크(5): [MBC 교실이데아] 논서술형 절대평가를 시행하는 입시를 바꿀 IB 프로그램 (2024.04.21. 방송)

( www.youtube.com/watch?v=Cl6bn6c_DZE )

(2024.04.30.)


2024/06/29

현상학이 양자역학 같은 것이라면



토비아스 헨셴(Tobias Henschen)이 쓴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성과 객관성』(Causality and Objectivity in Macroeconomics)이 몇 달 전에 출판되었다. 내가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로 마음만 먹고 사실상 진척이 거의 없었는데, 마침 헨셴의 책이 올해 출판되었으니 이 책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보아야겠다. 아직 안 읽어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모네타(Alessio Moneta), 라이스(Julian Reiss), 로젠버그(Alex Rosenberg)가 추천사를 썼으니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헨셴의 이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보이는데, 2001년에 철학과 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2009년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10년에 하이데거의 과학철학과 언어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헨셴이 일반 과학철학, 경제학의 철학, 칸트 철학에 관한 다양한 논문을 썼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겠는데, 경제학의 철학과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하이데거로 무슨 내용의 책을 썼을까? 읽고 싶지는 않지만 아주 약간 궁금하기는 하다.

분석철학 쪽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헨셴 말고도 대륙철학을 다룬 사람들이 종종 있다. 피터 싱어 같은 경우도 『Hegel: A Very Short Introduction』 같은 헤겔 개론서를 쓰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이병덕 선생님 등이 분석적 헤겔주의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심리철학 쪽에서는 현상학적인 것을 끌고 오는 경우도 있다. 훌륭하신 분들이 이러한데 대륙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무슨 특별한 의견이 있겠는가? 나는 대륙철학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생산성에 있어서는 분석철학이 대륙철학보다 확실히 더 낫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륙철학 전공자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내가 관찰하기로, 대륙철학에 관한 분석철학 대학원생들의 태도는 대강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유형은 관망자이다. 대륙철학에 뭔가 좋은 점이 있기는 있겠으나 잘 모르겠고 딱히 힘들여 알고 싶지 않으나 대륙철학 애호가들의 망상이나 경거망동을 대륙철학 자체나 대륙철학 전공자와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온건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의심자이다. 대륙철학에 무언가 좋은 점이 있더라도 그 못지않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학부 때 대륙철학 수업을 꽤 열심히 들었고 대학원 와서 가끔 대륙철학 전공자들의 발표를 들은 사람들 중 일부가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유형은 적대자들이다. 대륙철학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까지 생각했다가 회심하고 분석철학에 귀순한 사람들 중 일부가 적대자가 된다. 탈북 주민들이 북한 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저널 클럽 끝나고 점심 먹으러 가면서 내가 올해 출판된 헨셴의 단행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헨셴이 하이데거 관련 저작까지 출판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동료 대학원생은 비교적 최근에 학회에서 현상학 전공자의 발표를 들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이론이나 개념 하나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다 된다는 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동료 대학원생은 의심스러워했다. 동료 대학원생은 두 번째 유형인 의심자였다. 마침 그 날 저널 클럽에서 발제한 논문이 양자 역학에 관한 철학 논문이었다. 나와 동료 대학원생은 둘 다 문과 출신이라 논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동료 대학원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에서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하는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다 된다고 말하잖아요? 나는 양자역학을 모르니까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맞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정말 그러겠죠? 만약에 현상학이 양자역학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현상학이 철학에서의 양자역학 같은 것이고 현상학이 말하는 게 정말로 진리이고, 전공자들은 그걸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걸 보지 못하는 눈먼 자들이라면?”

내 말을 들은 동료 대학원생은 “어...” 하고 몇 초 간 말을 잇지 못하더니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2024.04.29.)


[외국 가요] 라디오헤드 (Radiohead)

Radiohead - Creep ( www.youtube.com/watch?v=XFkzRNyygfk ) ​ Radiohead - High and Dry ( www.youtube.com/watch?v=7qFfFVSerQo ) ​ Radiohe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