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이러스학 교재를 약간 읽어본 적이 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까지 천연두 바이러스가 DNA 바이러스이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RNA 바이러스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면 그 아르바이트는 나한테 안 오고 생물학 전공자한테 갔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 그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그래도 그 일이 해당 내용으로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나 같은 비-전공자한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이라서 큰 문제 없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일하고 받은 돈으로 10년 만에 노트북 컴퓨터를 새로 샀다.
바이러스학 교재를 보다가 우연히 신기한 것을 하나 알게 되었다. 바이러스 중에는 정20각형으로 생긴 것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바이러스가 정20각형인 것은 아니다. 나선형, 복합형, 외막형 등도 있다. 다른 건 안 신기했는데 유독 정20각형만은 신기해 보였다.
바이러스의 구조에 관한 연구는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릭과 왓슨은 바이러스의 구조가 대부분 구형이거나 막대형이라는 연구 결과를 1956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왜 구형이거나 막대형인가? 핵산이 길게 풀어졌을 경우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의 구조가 원통형(나선형)인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핵산이 둥글게 뭉쳤을 경우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이 구형인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 크릭과 왓슨은 구형 바이러스가 실제로 매끄러운 구가 아니라 정다면체일 것이며 그 중에서 정20면체일 것이라는 흥미로운 추측을 했다.
왜 구형 바이러스는 매끄러운 구가 아니라 정다면체여야 하는가? 바이러스의 유전 물질의 길이는 매우 짧기 때문에 캡시드(핵산을 둘러싼 단백질 덩어리)가 커다란 하나의 단백질이면 핵산에 모든 유전정보를 담기 힘들다. 이게 해결되려면 동일한 작은 단백질들이 규칙적인 배열을 반복하여 구형 바이러스를 형성해야 한다. 왜 정20면체인가? 구형 바이러스의 X선 회절사진과 전자현미경 사진을 보면 2겹 회전대칭축 열다섯 개, 3겹 회전대칭축 스무 개, 5겹 회전대칭축 스물네 개가 관찰되는데, 이는 정20면체와 정확하게 같은 성질이다. 이러한 두 가지 근거로 왓슨과 크릭은 구형 바이러스가 정20면체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실제로 폴리오바이러스(poliovirus, 소아마비 바이러스) 등의 구조가 정20면체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정20면체는 삼각형 스무 개로 구성된다. 왓슨과 크릭은 단백질 단위체 세 개가 삼각형 판 하나를 구성하니 구형 바이러스의 단백질 단위체가 최대 60개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이후 구형 바이러스의 단백질 단위체가 60개가 훌쩍 넘는 사례가 대거 발견되었다. 그래서 도널드 캐스퍼(Donald Caspar)와 에런 클루그(Aaron Klug)는 구형 바이러스가 유사-정20면체(pseudo-icosahedral) 구조를 따른다는 ‘준-평형 원리’(quasi-equivalence principle) 이론을 발표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간, 구형 바이러스가 정20면체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맨 처음 떠오른 건, 플라톤의 다면체였다. 정다면체는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 이렇게 다섯 개뿐이다. 이를 두고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정다면체와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를 연결한다. 정4면체는 불, 정6면체는 흙, 정8면체는 공기, 정20면체는 물, 정12면체는 우주이다.
내가 보기에, 『주역』에 컴퓨터의 원리가 있으니 디지털 세계에 관한 원리가 동양의 지혜에 원래부터 녹아 있었다는 것보다 바이러스가 정20면체인 게 훨씬 더 신기하다. 『주역』이 현대 사회에 관한 어마어마한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하려면 『주역』과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연결되고 라이프니츠와 컴퓨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텐데, 그 연결고리가 매우 약하고 느슨하기 때문에 웬만큼 어리석지 않고서는 그런 개소리에 놀아나기 힘들다. 반면, 바이러스의 경우, 바이러스가 정20면체든 유사-정20면체든, 하여간 그런 식으로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의 정20면체 구조, 플라톤의 다각형, 고대 그리스의 지혜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들기만 한다면, 주역에 컴퓨터의 원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낚을 수 있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주역』 가지고는 개소리를 하면서 플라톤을 가지고는 개소리를 안 할까? 왜 동양철학 교수들 중 일부는 나사 풀린 소리를 일삼아 하지만, 정암학당 선생님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까? 이러한 현상에 대한 나의 가설은, 유럽에서는 이미 그런 걸 다 해보고 시원하게 망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다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다각형은 케플러에게까지 이어진다. 갈릴레오, 뉴튼 등과 함께 나오는 그 케플러다.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던 케플러는 안쪽부터 구가 있고 그 구를 정다면체들이 둘러싸고 정다면체를 다시 구가 둘러싼 모형을 구상했다. 맨 안쪽부터 [구]-[정8면체]-[구]-[정20면체]-[구]-[정12면체]-[구]-[정4면체]-[구]-[정6면체]-[구] 형태로 겹겹이 둘러싼 것이다.
이런 게 왜 필요한가? 케플러는 여섯 구 위에 여섯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궤도가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건 틀렸다. 케플러씩이나 되는 사람이 플라톤의 다각형을 가지고 극한까지 끌어올려 모형을 만들어 보고 실패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후의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의 오묘한 지혜와 신비한 뭐시기를 만들어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배운 사람들이 배운 티를 내느라 걸핏하면 『주역』을 들먹였지만 막상 『주역』을 가지고 제대로 해본 것이 없으니 시원하게 실패한 것도 없다. 그러니 21세기가 되어서도 『주역』 가지고 염병하는 소리를 들어도 침 흘리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오는 것은 아닐까?
* 참고 문헌
김수정 (2021), 「융복합교육 기반 순수교양수학 수업을 위한 내용 제안: 바이러스의 구조를 밝히는 수학이론에 대하여」, 『교양학 연구』 제15권, 139-166쪽.
(2024.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