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8

수구의 온상인 서울대에 왜 세금을 쏟아붓냐는 칼럼을 읽고



<경향신문>에 실린 “‘수구의 온상’ 서울대에 왜 세금을 쏟아붓나”라는 칼럼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망한 글이다. 우선, 문단별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문단(1): 노동자는 자본가에 맞서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성취해왔다.

- 문단(2): 윤석열은 한 주에 120시간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노동현장을 모르는 것이다.

- 문단(3): 한국은 선진국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10만 명당 산재사망자수는 단연 1위다.

- 문단(4): 유권자의 절대다수가 임금노동자인 나라에서 노동에 적대적인 수구 포퓰리스트가 대통령 후보로 대거 나서는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문단(5): 첫째, 노동자를 대변하는 원내정당이 사실상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문단(6): 둘째, 노동자들이 연대하면 영향력이 커져서 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데 그게 안 된다.

- 문단(7): 셋째, 보수언론이 노동운동에 ‘시민 불편’이나 ‘정쟁’ 프레임을 씌운다는 점이다.

- 문단(8): 넷째, 근본 문제는 교육에 있다.

- 문단(9): 서울대 재학생, 졸업생들이 활동하는 트루스포럼과 스누라이프는 수구 정치인을 선호하고, 수구 정치인, 교수도 서울대 출신이 다수다.

- 문단(10): 부유・기득권층 출신이고 선민의식에 찌든 학생이 너무 많은 ‘귀족학교’에 왜 계속 세금을 쏟아부어야 하나?

이렇게 놓고 보면, 칼럼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단박에 나온다.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서울대 폐교 또는 국공립대 통합, 이 세 가지를 칼럼 하나에 넣고 비볐으니 정상적인 글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비벼넣은 세 가지를 하나씩 따로 분리해서 보면 멀쩡한 글이냐? 그것도 아니다. 문단별로 보아도 문제가 많다. 정상적으로 구성된 문단이 거의 없다. 한 문단 안에서도 문장별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열된다.

문단마다 문제가 있지만 인생은 짧으니 굳이 다 볼 필요는 없다. 마지막 두 문단만 봐도 칼럼이 망했음을 알 수 있다. 문단(9)-(10)은 다음과 같다.


서울대생・동문 소통공간이라는 트루스포럼과 스누라이프는 수구 정치인을 선호한다. 스누라이프 ‘2020년 하반기 자랑스러운 동문’ 1위는 윤석열, 2위는 윤희숙이다. ‘2021년 상반기 부끄러운 동문’ 1위는 조국, 2위는 유시민이다. 수구언론 어뷰징팀은 이런 조사 결과를 서울대생 전체 의사인 양 포털에 대서특필한다. ‘서울대생 96.2%가 문재인 탄핵 요구’,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이명박’이라는 식이다. 김문수・차명진 등 수구 정치인과 논객도 서울대 출신이 다수이고 현직 교수도 수구언론에서 활동하는 이가 많다.


2021학년도 정부지원금은 서울대가 5123억원인데 학생수가 더 많은 국립대도 2000억원 넘는 데가 없다. 나는 서울대를 전국 국공립대학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부유・기득권층 출신이고 선민의식에 전 학생이 너무 많은 ‘귀족학교’에 계속 세금을 쏟아부어야 하나?


문단(9)에서는 “수구언론 어뷰징팀”이 <트루스포럼>과 <스누라이프>가 수구 정치인을 선호한다는 것을 “서울대생 전체 의사인 양 포털에 대서특필한다”고 해놓고는 문단(10)에서는 “부유・기득권층 출신이고 선민의식에 전 학생이 너무 많은 ‘귀족학교’에 계속 세금을 쏟아부어야 하나?”라고 묻는다. 그래서 <트루스포럼>과 <스누라이프>가 서울대생 전체 의사라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리고 그게 서울대에 세금을 투입해야 할 이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학생들이 빈민이나 서민 출신에 선량하고 진보적이면 학교에 예산을 퍼붓고 학생들이 좀 싸가지 없고 보수 정당 지지하면 세금을 투입하지 말아야 하는가? 칼럼의 필자는 “서울대를 전국 국공립대학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고 말하는데, 다른 학교들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그런 주장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만약에 서울대보다 경북대나 부산대에 보수적인 학생들이 더 많다면, 그 학교들에는 예산 지원을 줄여야 하나, 늘려야 하나?

노동시간이 어쨌다는 둥 노동운동이 어쨌다는 둥 별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국 칼럼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하다. 보수정당의 대선 후보들이 꼴 보기 싫으니 그들의 출신 학교이자 그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많은 서울대에 예산을 주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글이 진보언론으로 분류되는 신문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언론개혁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을 때려잡는 것임은 충분히 알겠다. 보수언론에서 악의적으로 왜곡보도를 하는 것을 보면 좀 때려잡아도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진보언론에 실리는 일부 칼럼을 보면 과연 진보언론이 보수언론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대안이 되어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

* 링크: [경향신문] ‘수구의 온상’ 서울대에 왜 세금을 쏟아붓나 / 이봉수

(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7270300055 )

(2021.07.28.)


2021/09/25

[한국 가요] 이현우 (Lee Hyun Woo)



이현우 - 슬픔 속의 그댈 지워야 해

( www.youtube.com/watch?v=dYtyr86jZPU )

이현우 - 꿈

( www.youtube.com/watch?v=9NnFLu6H7hI )

(2024.03.17.)


[인식론] 김기현 (2003), 제6장 “토대론과 정합론” 요약 정리 (미완성)

[ 김기현, 「제6장. 토대론과 정합론」, 『현대 인식론』 (민음사, 2003). ]

다음 믿음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되는 믿음을 ‘추론적 믿음’

-> 믿음 간의 상호관계

-> 토대론/정합론 논쟁

- 토대론(피라미드)

(1) 정당한 믿음은 그 정당성을 다른 믿음에 의존하는 믿음과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믿음으로 구분 (토대적 믿음/ 비토대적 믿음)

(2) 기초적 믿음이 인식 정당성의 원천, 다른 믿음의 정당성은 기초적 믿음에 의존

(3) 인식 정당성은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제한: 필연적 의존 관계의 일방향성이지 사실적 의존관계의 일방향성이 아니다. 반드시 여러 층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 정합론(뗏목)

: 한 체계를 이루는 믿음 사이에 정당화되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다.

-> (1)을 부정

체계 내의 정당성은 상호적으로 일어난다. -> (3) 부정

다른 믿음에 의존함이 없이 정당하게 되는 믿음은 없다 -> (2) 부정

(1) 믿음 체계는 논리적으로 일관된 한에서만 정합적이다.

(2) 믿음 체계의 정합성은 확률적 일관성의 정도에 비례한다.

(3) 믿음 체계의 정합성은 그 요소 믿음 사이의 추론적 연관성이 존재할 때 증가하고, 그것이 증가하는 정도는 그러한 연관성의 수와 강도에 비례한다.

(4) 믿음 체계의 정합성은 추론적 관계를 통하여 상호간 적대적이지 않은 하부체계의 정도에 반비례하여 감소한다.

(5) 믿음 체계 내에서 설명되지 않는 이례항의 존재와 비례하여 그 체계의 정합성은 감소한다.

토대론이 옹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구조

정합론이 옹호하는 것은 개별적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한 선행적 조건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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