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0

성년의 날에 먹은 순대국밥을 먹은 후배



많은 사람들은 대학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입학하지만 현실을 마주하고 좌절한다.

성년의 날에 장미꽃과 향수와 또 다른 무언가를 받을 줄 알았으나 그 중 단 한 가지도 받지 못했던 여학생이 있었다. 성년의 날이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며 동아리방에 들어오니, 넓은 동아리방에 선배 한 명만 덜렁 있었다. 선배가 물었다. “밥 먹었냐?”, “안 먹었는데요.”, “밥 먹으러 가자.”

선배가 후배를 데려간 곳은 3대째 순대국밥을 만들어왔다는 유서 깊은 순대국밥집이었다. 순대국밥을 좋아하는 선배였다. 그날 그 여학생은 알게 된다. 아, 인생이 별 게 없구나, 하고.

그날 먹은 순대국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 그 여학생은 전 세계를 떠돌았다. 그러다 호주에서 네덜란드 남성을 만나 7년 만에 결혼했다.

성년의 날에 후배에게 순대국밥을 먹인 선배는 나였다. 후배는 그 때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식 뒤풀이에서 후배는 그 날 내가 순대국밥에서 고기며 간이며 순대며 하나씩 젓가락으로 꺼내서 새우젓에 찍어먹은 후 밥을 말아먹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나는 한참을 웃었다.

(2014.04.28.)


2014/05/07

이야기가 엉성한 <맨 프럼 어스>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가 공연한 <맨 프럼 어스>를 보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이야기가 엉성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작품 각색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어서 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영화 내용도 연극과 똑같았다. 각색의 문제가 아니라 원작의 문제였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주인공 존 올드맨은 10년 간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종신교수직을 거절하고 갑자기 이사간다고 한다. 동료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1만 4천 년을 살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채지 않도록 10년 마다 신분을 바꿔 이주하다 보니, 함부라비 밑에서도 살아보고 부처도 만나보고 하여간 역사 곳곳에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신약성서에 예수로 기록되었음을 털어놓는다. 개그콘서트 <달인>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점은, 주인공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나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데도 그의 동료 교수들이 죄다 얼빠진 얼굴로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동료들이 괜히 화를 낸다든지 슬퍼한다든지 총을 꺼낸다든지 하는 장면도 있다. 죄다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 그의 동료들은 주인공이 말한 경험이 현재까지 밝혀진 지질학이나 역사학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주인공의 주장이 입증되지 않는다. 그 정도 이야기는 일정 정도의 상식만 있으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주인공이 어떠한 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골동품점에서 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자기가 1만 4천 년을 살아왔음을 입증하려면 기존 이론과 부합하는 증언이 아니라 기존 이론이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증언을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 무덤에 관한 기사를 사실로 믿지 않고 설화를 적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발굴 결과 상당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사기』의 사료적 가치가 입증된 바 있다. 진시황릉에 수은으로 강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진시황릉 주변 토양을 검사한 결과 수은 농도가 다른 지역의 몇십 배 높게 측정되었다든지,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다든지 등의 사례는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기존의 역사 이론에서는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것이었다.

이를 응용한다면, <맨 프럼 어스>의 개연성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을 주인공이 증언하는 장면을 넣는다면 어땠을까? 가령, 동료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했으나 아직 학계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주인공이 그 곳에서 어떤 유물이 출토되었을 것인지 말해서 그 고고학자를 놀라게 한다든지, 전승되지 않은 기록의 일부를 말해서 기존의 연구에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한다든지 등의 장면을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상의 역사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에서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의 반론도 어설프다. 주인공의 주장이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주인공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도 상식에 안 맞는다”고 하고, 언제부터 자신이 예수라고 생각했냐는 물음에 주인공은 “당신은 언제부터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했냐?”고 반문한다. 이런 어설픈 반론에 박사나 교수라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니 말이 되는가?

나는 이 영화의 소재가 흥미롭다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구성은 그다지 치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맨 프럼 어스>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어떤 평론가는 “미신숭배자들의 신성을 파괴하는 데서 쾌감과 동력을 얻어 굴러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영화에서 제시하는 바는 그냥 상식선에 있다. 성서에는 고대 사회의 여러 신화가 섞여 있고 이교도적인 요소가 혼재하니까 성서를 글자 그래도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든가, 예수의 메시지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주장인가? 사정이 이러한데, 네이버 영화란에 기자-평론가들은 “꽉 짜인 구성”이네 “논리적으로 착착 꿰어지는 수다가 황홀하”네 어쩌네 한다. 종교만 까면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한 평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평론가라고 한다면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2014.03.28.)

2014/04/29

복숭아뼈 옆 반핵 문신



기숙사에서 어떤 여자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여자는 키가 나와 비슷하고 말랐으며 화장기도 거의 없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보니, 그 여자의 복숭아뼈 옆에 엄지손톱만한 문신이 있었다. 반핵 표시? 보통은 글씨나 그림을 문신으로 새겨 넣는데, 그 여자의 문신은 반핵 표시였다. 문신으로 반핵 표시를 왜?

순간,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가? 내가 아는 활동가 중에 문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반핵 문신을 새겨넣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 것인가? 환경단체 회원인가, 채식주의자인가, 무슨 전공인가, 학부 때 무슨 활동을 했나? 아, 궁금하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을 걸면 첫 마디를 뭐라고 꺼내야 하나? 첫 마디를 문신 이야기로 꺼내면 나를 젊은 꼰대로 오인하고 도망가지 않을까?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개수작 부리는 놈으로 알 텐데.

고개를 다시 들어 그 여자를 보았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여자가 내렸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2013.10.27.)


2014/04/13

평소 행실의 중요성



평소 행실이 이렇게 중요하다.












* 출처: 삼국연의(1993), 11회 완성 전투(宛城之戰)

(2014.02.16.)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