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국과학철학회 학술대회에서 과학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세션이 있었는데 발표 끝나고 토론 시간에 선생님들 간의 언성이 약간 높아진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떤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선생님이 발표 내용을 두고 “과학철학이 경찰 노릇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에 발표자 선생님은 “그렇다면 이런 논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까?”라고 하면서 약간 격양되었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다들 온화한 성품을 지닌 분들인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 세션장에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하여간 나는 발표자 선생님의 대응이 썩 적절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해당 발표를 대충 들은 사람에게는 해당 논의가 망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술대회 발표장에서 어떤 질문을 받고 “그렇다면 이런 연구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라고 발표자가 가끔씩 있다고 한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정말로 발표 내용이 연구 가치가 거의 없거나 연구가 아니어서 그러는 것이다. 발표자 선생님이 한 이전 연구나 발표를 감안한다면, 과학철학의 역할에 대한 그 선생님의 발표는 나름대로 가치 있는 것이었을 텐데, 아무 가치 없는 거나 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일 법한 대응을 했으니 해당 논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잘못된 신호를 전달했을 수 있다.
내가 발표자였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당시 발표를 들었던 사람에게 듣기로, 질문한 선생님이 말한 “경찰 노릇”은 과학철학이 과학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질문한 선생님이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니 “경찰 말고 자경단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면 어떨까? 자유주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답할 것 같다. 자경단 말고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기관은 어떨까? 신용도를 평가하고 어떤 건 투자 적격, 어떤 건 투자 부적격 하는 판정을 내린다면? 그런데 과학철학이 과학 연구에 대한 신용도 평가나 투자 적격 판정을 내릴 수 있나?
확실히, 연구 윤리 같은 것은 중요하고 철학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맞다. 문제는 이게 과학철학만 손댈 수 있는 영역에 있느냐는 것이다. 연구 “윤리”이니 윤리학 하는 사람들이 침 바르기에 더 좋지 않을까? 과학철학 전공자들 중 대다수는 이공계 학부 출신이라 대체로 윤리학 전공자보다 과학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겠지만, 윤리학 전공자 중에 “저도 학부 때 이공계였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과학철학 전공자들이 과학자들이 보기에 매력을 느낄 만한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막상 이야기하기는 좀 귀찮고 까다로운 부분을 과학철학자들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처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가령, 재현성 위기와 관련하여 과학자들 나름대로 고민도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자기가 한 실험이 재현하는 데 왜 실패했는지를 고민해야지 재현성 위기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고민할 시간에 실험 한 번 더 하는 게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재현성 위기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과학철학자여야 한다. 그게 훨씬 더 저렴하다.
과학자들이 과학철학에 느낄 또 다른 매력은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경제학의 경우, 경제학을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는 부당한 비난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0년 전쯤의 경제 이론을 가져와서는 현실에 맞네 안 맞네 하거나,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냥 빨갱이 같은 소리를 하고 싶어서 주류 경제학이 어쩌네 하며 욕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게 그냥 인터넷 댓글 수준으로 끝나면 다행일 텐데 강연이나 출판으로도 이어지기도 한다. 그걸 왜 경제학자가 반박해야 하는가? 왜 파리나 모기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쓰는가? 과학철학자 중 경제학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경제학자들 대신 그런 것을 잡아야 한다. 그게 훨씬 경제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철학은 부잣집의 집사나 사설 경비업체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 뱀발
사설 경비업체와 관련하여 약간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외부의 (부당한) 공격을 막는 역할도 있지만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다른 과학자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어떤 박사가 있다고 해보자. 그 박사는 자기 분야에서 그렇게 연구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도 멀쩡히 연구 잘하는 사람들한테 네 연구는 연구도 아니라고 하면서 시비를 걸고 다니고, 과학철학 같은 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다른 과학자들이 과학철학을 더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아는 체나 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어느 날은 과학자들이 행사 끝나고 행사장에서 와인 한 잔씩 마시고 있는데 또 그 박사가 돌아다니며 재현성의 위기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다. 다른 과학자들은 그 박사와 말하기 싫어서 못 들은 척하는데, 그 박사가 과학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면서 과학철학계에 대해 퍽이나 아는 척하며 과학자들의 술맛을 뚝뚝 떨어뜨린다. “장하석 교수는 그 답을 알고 있을까?” 이딴 소리나 하면서 말이다. 과학계에서 재현성의 위기를 언급하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최소 몇 년은 지나야 과학철학 쪽에서 그와 관련된 연구가 나오기 시작할 테니, 과학계에서 관심사를 과학철학이 곧바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든 말든 그 박사는 아는 체하는 게 중요하지 그런 건 알 바 아니므로 젠체하며 행사장을 돌아다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과학자들이 “아무개 박사, 술맛 떨어지는 소리 좀 그만 해!”라며 직접 제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박사는 자신을 제지하려는 과학자들을 두고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과학자”라며 비웃을 것이다. 이 때 사설 경비업체가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위아래 검정옷을 입은 근육질인지 근육돼지인지 애매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등 뒤에는 “현명한친구들”이라고 업체명이 써있다. 업체 직원은 박사를 정중히 제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 날개를 편다는데, 아직 해가 안 졌습니다. 해질 때쯤 되면 연구가 슬슬 나오겠죠.”
과학자들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업체 직원이 행사장 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2024.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