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2

[과학철학] Fine (1984), “The Natural Ontological Attitude” 요약 정리 (미완성)

     

[ Arthur Fine (1984), “The Natural Ontological Attitude”, in J. Leplin (ed.)(1984), Scientific Realis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83-107. ]



  1. Arguments for Realism

  2. Realism and Progress

  3. Nonrealism



83-84

실재론은 죽었다.

신실증주의자들은 그 죽음을 알렸으며, 실재론의 존재(외부의 세계)에 대한 요구(질문)은 사이비 문제임을 선언했다.

보어의 비-실재론 철학이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거둔 승리로 그 죽음을 독촉했으며, 이후 물리 철학자들은 실재론을 뒤로했고, 과학은 실재론 없이도 성공적이었다는 실재론의 죽음을 증명했음.

최근의 철학 문헌에서 몇몇 이들이 죽은 실재론을 되살리려 시도하고 있음.

- 파인이 이 논문에서 논증하는 것

(1) 실재론의 논변이 타당하지 않으며, 실재론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2) 20세기 과학 발전에 대한 비-실재론적 태도의 본질적 역할을 보여주어 실재론만이 진보적인 과학철학을 제공한다는 생각을 약화시키는 것.

(3) 비-실재론자의 가능한 태도 등



  1. Arguments for Realism


84-85

실재론 논변을 두 가지 수준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초적 수준(Ground level): 개개의 성공에 주목한다. 참신함, 예측성…… 라우든의 반론.

방법론적 수준(Methodological level): 도구주의에 대한 포퍼의 공격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보이드와 퍼트남에 의해 발전되었음. 과학활동의 방법에 주목함.

왜 이러한 실재론자들의 방법만이 과학의 성공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가?


[87]

- “적은 수”(small handful)의 문제: 과학에서 적은 수의 대안 이론들만이 있다(Putnam). 왜?

답변: 이미 존재하는 이론들은 그 영역 내에서 근사적으로 참이다. 성공적인 요인들을 보존하는 가운데서 연구를 진행할 경우 기존의 이론들에 의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87]

실재론자들의 답변

이미 존재하는 이론들은 그 영역 내에서 근사적으로 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연구하게 되면 기존의 성공적인 이론들에 의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요인들은 보존해야 하니까. 


[87-88]

- 적은 수 문제는 세 가지 문제를 일으킴.

(1) 왜 무한한 가능한 이론들 중 적은 수의 이론들만이 고려되는가?

(2) 적은 수의 이론들 사이에 보수적인 가족적 유사성이 있는가?

(3) 이와 같이 선택을 좁히는 전략이 잘 작동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실재론은 답을 줄 수가 없다.

선행 이론과 유사한 이론으로 후속 이론들을 제한해도 적은 수보다 많은 이론이 나올 수 있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실재론자들은 근사적으로 옳은 존재론과 근사적 참의 법칙으로 대응할 것임.

“T가 잘 확증된 이론이라면 T가 요구하는 실체가 있으며, T가 요구하는 법칙을 근사적으로 만족하는 법칙도 있을 것이다”

과학에서 존재론적으로 극적인 변화는 이러한 도식은 효력이 없음을 보여 준다.

예) 전기역학에서의 에테르, 러더포드-보어의 원자 모형과 고전적 에너지 법칙에 따른 회전하는 계

잘 확증된 것과 근사적 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 뿐, 확률적 증거가 없다.

근사적 참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독립적 증거도 제시할 수 없다. 실재론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본래의 전략으로 돌아와서 근사적 참은 최선의 설명을 제공하고 그러니 잘 확증된다.

이러한 전략은 다시 이전의 기초적 수준의 논변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라우든의 반론).


[88-89]

질문(3): 적은 수의 전략은 왜 잘 작동하는가?

실재론자들은 선행 이론에서 후속 이론으로 근사적 참이 전달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려 함.

과학사에서 후속 이론의 성공은 새로운 기초를 세우거나, 참신한 예측을 하거나, 아니면 이전 이론의 이상 현상들을 극복하여 나타난다. 선구 이론의 근사적 참의 개념이 그 이론의 잘 입증되지 않는(less-confirmed) 부분을 수정하면 더 발전된 이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사에서는 이런 땜질식 처방이 성공하는 것보다 대부분 실패하는 것을 더 잘 보여줌.


[89]

적은 수의 문제는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실재론자의 답변

질문(1)에는 답변 못함할 길이 없다.

질문(2)에는 설명적인 가설의 참이라는 논점회피 방법 이외에는 답변할 길이 없다.

질문(3)에는 대답할 만한 원천이 없음.

이와 비교해서 실재론의 최대의 적인 도구주의자들의 대처를 보자.

이들은 적은 수과 좁음의 문제에 대한 방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대안 이론이 이미 도구적으로 성공한 이론이 제기하는 많은 경험적인 제약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함.

더 나아가 과학자들이 도제 비슷한 형식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연구영역에 있어서 선택이 줄어들 수밖에 없음. 이미 받아들인 범주 내에서 활동함.

도구주의적인 규칙 “전에도 잘 되었으면, 또 그렇게 해봐라.”

이러니까 결국 다룰 수 있는 이론은 적을 수밖에 없고, 좁혀지는 것임.

도구적으로 성공한 과학에서 이런 것이 사실 잘 작동하지 않음은 이미 보여주었음. 

여하간 도구주의자들은 과학자 집단이 그들의 지식을 “창조”한다고 함.

연결을 통해 사회적으로 지식이 구성된다. 

그러니까 과학자 집단이 사회적 구성물이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여하간 잘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

적은 수의 문제로 돌아와서, 도구주의자들은 셋 중 둘은 잡는데, 실재론자들은 스트라이크 아웃임


[89-90]

방법론적 수준에서 실재론자들의 실패의 근원은 고질적임

논점회피 하는 거. 근사적 참에 대해서 제대로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러함.

이중의 의미

근사적 참이란 더 나아가고(발전된) 참신한 거,

다음으로는 대응관계로서 진짜로 접근하는 거.

첫 번째에는 무슨 연결될만한 것이 없고 두 번째에도 접근할 만한 것이 없음.

이 두 가지가 적은 수의 문제에 있어서 실재론자들의 방안을 감염시킨 것은 사실임.

이제 연언의 문제를 보자.


90

연언의 문제는 다음과 같음.

T와 T′이 독립적으로 잘 확증된 설명력 있는 이론이라 하자.

둘 사이에 애매모호한 공유되는 용어가 없다면, 우리는 이 T와 T′의 연언(conjunction)이 신뢰할 만한 예측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왜? 실재론자들의 답변은 T와 T′이 근사적 참이고, 잘 확증되어 있다면, 존재자들에 대해서 근사적으로 참임.

공통된 기준 영역에 대해서 모호성이 없다면. 두 이론의 연언 또한 근사적으로 참이고, 그러므로 신뢰성 있는 관찰적 예측을 제공할 것이다.


90

실재론자들은 근사적 참을 오용함.

“T가 근사적으로 참이다.”, “T′이 근사적으로 참이다.”에서 연언인 이론 “T・T′”이 참이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데에 논리적인 연결이 나올 수 없음.

T에 대해서 어떤 파라미터를 ε라고 하자,

T′도 ε라고 하면 그 연언은 2ε가 될 것임.

근사적 참의 논리는 적용해 보면 반대의 결론이 나옴.

두 이론의 연언은 각 이론보다 신뢰성이 더 떨어짐.(계산기를 통해 계속 근사값으로 계산을 할 경우와 비슷할까?).



  2. Realism and Progress


 

91-92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관한 1905년의 논문에서는 초기 실증주의와 마흐(와 흄)에게 방법론적인 빚을 지고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경향은 1916년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논문에서도 나타났으며 여전히 마흐주의자의 선상에 서 있다. 도구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자세가 아인슈타인의 철학적 기원임.

1920년대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은 실재론으로 방향전환을 일반상대성 이론에서의 이론적 실재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애씀.

일단 대다수 과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상대성 이론은 천체물리학과 천문학에 있어 중력문제를 조직화하는 도구를 제공함.

상대성 이론의 물리학에서 비-실재론적 자세야말로 이론의 발전에 중요했으며, 그 창설자가 실재론을 신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의 생산성은 끝났다(더 이상 진보를 이루어내지 못했음).

그러나 그의 이론은 “거다란 참”으로서 나타나기보다는 강력한 도구로서 실질적으로 작동했음.


[92-93]

양자역학에서는 좀 다르다. 하이젠베르크는 관찰불가능한 것을 기준(reference)으로 삼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실재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도 버렸음.

슈뢰딩거도 실재를 지시하려는 생각을 포기했음.


솔베이 회의에서 이러한 비실재론자의 포지션이 확실히 정리(강화)되었고 지금까지 굳건함. 이러한 양자 비실재론은 이제 뭐 물리하가라면 다 배우는 거고, 이러한 개념적 배경 아래 지난 50년간 원자, 핵, 소립자 물리학 등등에서 빛나는 발전을 이끌어 냈음.


양자역학의 해석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에서 보어는 하이젠베르크, 좀머펠트, 파울리, 보른 등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은 새로운 물리학이 공고히 되고 명확화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음.

또한 실재론이 다음 세대의 명석하고 훌륭한 학생들을 과학의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지 않을까 두려워 했음.



[93]

알프레드 랑데의 증언


양자역학에서의 설명은 실재론자들의 프로그램에서야 실재의 근사적 참에 기반하여 수식과 이론을 세우고 성공했다고 말하겠으나, 이건 뭐 과학을 막다른 골목에 집어 쳐넣는 행위. 


[94]

실재론적 기반의 과학은 성공적인 이론을 내어 놓은 것이 없음.

아인슈타인의 통일장이나, 드 브로이의 파일럿 파나, 봄의 숨은 변수나 과학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음.

물리학의 철학자들 중 실재론의 기반에서 양자역학을 정교화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함.

예) 퍼트남

그러나 결국 패배로 끝날 것임. 벨의 부등식 문제.

반 프라센의 표현을 빌자면 “실재론의 카리브디스”.


[94]

양자역학의 성공에 있어서 비-실재론적 자세가 기여한 바가 큼.

실재론적 자세는 무익할 뿐임.

복소수에 무한 차원이 등장하는 양자역학이 4차원 다양체의 상대성 이론보다 더 어렵고 진지함(?). 실재론자들의 해석보다 시공간 구조에 대해 더 실용적인 자세

맵시 쿼크의 문제




  3. Nonrealism


실재론자나 반실재론자나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more homely truth와 동등한 ‘참’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것임.

과학적 참을 받아들이는 것을 “핵심 입장(core position)”라고 하자.

실재론자들과 반-실재론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이 핵심 논거에 무엇을 첨가하느냐이다.


반-실재론자들은 이러한 핵심 입장에 참 개념에 대해서 별도의 분석을 추가함.

이러한 첨가자는 존재 문장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님.

반-실재론자들은 어떠한 방법론적 구조를 더하기도 함.


[97-98]

실재론자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정말로!”를 외침.

실재론자들이나 반실재론자들 모두 전자에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할 것임.

전자가 정말 질량과 전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

실재론자는 “전자가 실재한다, 정말로!”라고 말함.

전형적인 실재론자들의 강조는 소극적 기능과 적극적 기능이 있음.

소극적 기능은 양쪽 모두가 동의하는 핵심적인 수락(core acceptance)에 반실재론자들이 무언가(개념에 대한 현상적인 환원, 진리에 대한 실용적 개념) 추가하려는 것을 막는 것.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첨가자가 진리나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함.

“아니다, 반실재론적인 축소된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실재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적극적 기능은 실재론자들은 참 또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주장을 실재에 관한 주장으로 여기는 것의 의미를 확고히 설명하려 함.

이러한 입장의 무르익은 버전이 세계와의 대응으로서의 참 개념, 그 대리물로서의 대응과 근사한 것으로의 근사적 참의 개념.

사실 이런 것은 단지 술책에 불과함.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한 표면적인 장식이며 강요된 합리적 믿음임.

부가적인 “정말로”는 주의를 끄는 발소리에 불과하면 논리적으로 말해 아무런 힘이 없다.


[98-99]

다시 말해 실재론이나 반실재론이나 핵심 입장에 무언가 끌릴만한 것을 추가한 것일 뿐임.

핵심 입장은 그 자체로 그 전부이다.

핵심 입장은 실재론적인 것도 반-실재론적인 것도 아님.

이에 핵심 입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연적 존재론적 태도(Natural Ontological Attitude, 이하 NOA)를 제안함.

NOA는 과학의 성과를 참으로 받아들이라는 입장

일상적이고 친숙하게 지지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과학의 확증된 결과를 받아들이면 됨.

NOA는 일상적인 지시적 의미론(ordinary referential semantics)을 인정하고, 개별자들의 존재, 속성, 관계 과정에 대한 과학적 언명을 참으로 받아들이라고 함.

믿음의 정도는 생각건대 확증의 통상적인 관계와 증거적 보조, 과학적 원리들로 결정

NOA는 실재론과 같은 진보를 말하지 않음.

“noaer”는 과학자로서 그가 작업하는 전통적 맥락에서 그의 이론이 지시하는 존재자의 실재를 믿음.

따라서 noaer는 쿤 식의 ‘패러다임 변화’가 있을 경우 지시물에 전면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음.

쿤의 주장과도 잘 들어맞음.

실재론과 달리 NOA는 패러다임 변화에 자유롭게 사실들을 검토할 수 있음.

공약불가능성에도 맞아 떨어지는 듯.


[99]

외부세계에 본질적인 관점을 제시함(실재론자들과는 다른?).

실재론자들은 과학이라는 게임에 대해서 장외에서 관전하고 심판했음.

그러나 경기장 밖에 서 있으면서 경기장의 일부를 조사하는 것으로 게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음.


[99-100]

파인은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함.

우리가 어떻게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전자에 대해서 전자가 ‘바깥세계 어딘가’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전자 게임에 있어서 주장, 방법, 예측적 성공에 대해서 피해 있을 수 있음.

전자에 관한 이론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세계 안에 있음.

물리적이건 개념적이건, 과학의 실재들, 개념들, 과정들 사이에 있음(과학이 다루는 것 안에 속해 있다, 과학적 세계의 일부이다).

외부 세계에 대해 통상적인 과학적 추론은 아직 그 어떤 것도 정말로 “저쪽에” 있다고 만족스럽게 이야기할 수 없음..


[100]

실재론자들은 환상을 쫓고 있음.

NOA는 적은 수의 문제와 연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

적은 수의 문제에서 곤란했던 거는 왜 우리는 성공적인 예측을 낳는 적은 수의 좁은 대안들을 가지느냐는 것.

문제는 대부분의 좁은 대안들은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

이에 NOA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마일 어떤 진리에 기초해서 추측하는 것이 순수하고 단순한 추측보다 성공적이라고 믿는다면, 만일 선행하는 이론들이 부분적으로 참이고, 그것에 대한 개선이 참인 부분을 보존하는 것이라 할 때, 이러한 기초에서 추측하는 것은 성공할 수도 있음.


같은 방식으로 연언의 문제에 있어서 NOA는 도움을 줄 수 있음.

만일 두 가지 일관된 이론이 겹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겹치는 영역의 구성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참이 있다면, 연언된 이론은 각각의 참을 더하는 것이고 새로운 진리를 산출해 낼 수 있음.


[101-102]

NOA는 과학철학에 있어서 최소주의적인 입장임.

실재론은 NOA에 외적 방향성(?, 바깥세계, 근사적 참)을 더한 것이고, 반실재론자들은 내적 방향성(참, 개념, 설명에 대한 human-oriented)을 추가한 것임

NOA는 과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혁명적인 접근임.

18세기의 신학적인 도덕주의자들이 윤리학의 몇 페이지를 읽어보고 느꼈을 상실감을 실재론자들 역시 느낄 것임.

NOA가 그들이 오랫동안 간직했을 ‘외부세계와의 일치(대응?)’이라는 것을 제거했기 때문.

그러나 파인은 더 나은 철학으로 NOA를 추천함.



(2022.09.13.)

    

2022/05/01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마치 거대한 전환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격변하는 시대, 거대한 전환,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꿰뚫어 보는 냉철하고 통찰력 있는 나, 얼마나 자의식이 고양되기에 충분한가? 뻥쟁이들이 주접 싼 것을 주워들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자의식 고양에는 충분한 밑거름이 된다.

그런데 ‘코로나19’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보자.

“우리는 라이터 발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당연하다. 담배 한 모금 빨아마시려고 부싯돌로 불을 붙인다고 생각해보자. 다른 것도 다 된다.

“우리는 세탁기 발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인터넷 발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원시인 아저씨가 돌을 다른 돌에 갈면서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간석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또한, 이렇게 말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2002년 월드컵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IMF 금융위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1987년 6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뻔하고 당연한 소리다. 어떤 현상이든 어떻게든 사회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고,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마법사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같은 무의미한 소리나 내뱉는 것보다는 코로나19 때문에 벌어진 변화 중 어떤 변화가 일시적이고 어떤 변화가 장기적일지 예측하고 분석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겠다. 그러나 쥐뿔이나 내용 없이 수사로만 승부를 보는 사람들이 코로나19라고 해서 퍽이나 유의미한 작업을 하겠는가?

현대사의 다른 사건들과 비교해볼 때 코로나19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을까? 한국 사회에 국한해본다면, 아마 88 올림픽보다는 약하고 2002 월드컵보다는 세지 않을까 싶다.

(2022.03.01.)


[외국 가요]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Billie Holiday - I’m a fool to want you ( www.youtube.com/watch?v=qA4BXkF8Dfo ) ​ Billie Holiday - Blue Moon ( www.youtube.com/watch?v=y4b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