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3

[학술] 한국학술재단(KCI) 등재지 - 철학

     

(2022년 4월 기준)

  

 

■ 우수등재지

  

- 철학 (Korean Journal of Philosophy) /한국철학회

 

 

■ 등재지

 

- 과학철학 (Korean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 한국과학철학회

- 논리연구 (Korean Journal of Logic) / 한국논리학회

- 철학적 분석 (Philosophical Analysis) / 한국분석철학회

 

- 철학연구 (Journal of Korean Philosophical Society) / 대한철학회

- 철학연구 (Journal of The Society of philosophical studies) / 철학연구회

- 대동철학 (Journal of the Daedong Philosophical Association) / 대동철학회

- 범한철학 (PAN-KOREAN PHILOSOPHY) / 범한철학회

- 철학논총 (Journal of the New Korean Philosophical Association) / 새한철학회

- 동서철학연구 (Studies in Philosophy East-West) / 한국동서철학회

 

- 철학사상 (Journal of Philosophical Ideas)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철학논집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 철학연구 (Philosophical Studies)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 철학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 /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 중세철학 (Philosophia Medii Aevi) / 한국중세철학회

- 근대 철학 (Modern Philosophy) / 서양근대철학회

 

- 칸트연구 (Kant Studien) / 한국칸트학회

- 헤겔연구 (Hegel-Studien) / 한국헤겔학회

- 니체연구 (The Journal of Korean Nietzsche-Society) / 한국니체학회

- 철학과 현상학 연구 / 한국현상학회

- 현상학과 현대철학 / 한국현상학회

- 존재론 연구 (Heidegger Studien) / 한국하이데거학회

- 현대유럽철학연구 (Researches in Contemporary European Philosophy) / 한국하이데거학회

 

- 가톨릭철학 (The Catholic Philosophy) / 한국가톨릭철학회

- 미학 (The Korean Journal of Aesthetics) / 한국미학회

- 사회와 철학 (Social Philosophy) / 한국사회와철학연구회

- 시대와 철학 (A Journal of Philosophical Thought in Korea)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의철학연구 (Philosophy of Medicine) / 한국의철학회

- 한국여성철학 (Korean Feminist Philosophy) / 한국여성철학회

- 환경철학 (Environmental Philosophy) / 한국환경철학회

 

- 인간연구 (Journal of Human Studies) /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 인격주의 생명윤리 (Personalism Bioethics) / 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 인간.환경.미래 (Human Beings, Environment and Their Future) /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 생명윤리정책연구 (Bioethics Policy Studies) /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 생명연구 (Studies on Life and Culture) /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 동양철학 (The Journal of Asian Philosophy in Korea) / 한국동양철학회

- 동양철학연구(Journal of Eastern Philosophy) / 동양철학연구회

- 한국철학논집 (The Journal of Korean Philosophical History) / 한국철학사연구회

 

- 유학연구 (Studies in Confucianism)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 양명학 (YANG-MING STUDIES) / 한국양명학회

- 남명학연구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 퇴계학논집 (TOEGYE-HAK-LON-JIB) / 영남퇴계학연구원

- 인도철학 (The Journal of Indian Philosophy) / 인도철학회

- 일본사상 (Journal of Japanese Thought)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 동방문화와 사상 (East Asian Culture and Thought)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선도문화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22.04.07.)

    

2022/03/22

[과학철학] Hacking (1983), Ch 4 “Pragmatism” 요약 정리 (미완성)

     

[ Ian Hacking (1983), Representing and Intervening: Introductory Topics in the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58-64.

  이언 해킹, 4장. 「프래그머티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 이상원 옮김 (한울, 2016). ]



  1. The road to Peirce

  2. Repeated measurements as the model of reasoning

  3. Vision

  4. The branching of the ways

  5. How do positivism and pragmatism differ?



[58-59]

실재라는 개념은 언제 생겨나는가? 그것은 (환영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우리 자신을 교정했을 때 생겨난다. 실재는 어떤 정보와 추론으로부터 최종적으로 귀착되는 무언가이다. 이러한 실재 관념에 대한 기원을 볼 때, 실재 관념은 모종의 공동체 ― 그 공동체의 한계를 규정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지식의 증가를 가능케하는 능력을 가진 ― 관념과 연결된다. -- 퍼스(1868). 



  1. The road to Peirce


퍼스는 진리를 외적 실재와의 어떤 대응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은 칸트에 동의했음.

한편, 헤겔처럼 진보가 인간 지식의 본질적 특징임을 당연하게 생각했음.



  2. Repeated measurements as the model of reasoning


[60]

퍼스는 반복된 측정이 수렴하는 것처럼, 충분히 오랫동안 계속된 탐구는 안정된 의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봄.

“진리는 끝나지 않는 탐구자 공동체에 의해서 도달되는 안정된 결론이다.”

퍼스는 참을 방법으로 대체함.


퍼스에게, 참은 거칠게 보아 (연역, 귀납,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에 기초한) 탐구의 방법 위에 정착하게 되는 그 무엇임.

이에 덧붙어 퍼트남은 그 탐구의 방법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으며, 추론의 새로운 스타일은 옛 것 위에 수립될 수 있다고 말함.

또한 추론의 스타일은 누적될 수 있다고 봄.

그렇다면, 참을 위해서는 두 가지 종류의 ‘정착’이 필요함.

(1) 누적된 사고 양식, 즉 합리적 방법의 장기적인 정착

(2) 이들 진화하는 몇몇 합리적 방법들에 의해 동의되는 사실의 장기적인 정착



  3. Vision



  4. The branching of the ways


[]

퍼스는 ‘방법(추론의 스타일)’, ‘최종적인 귀착(동의)’, 이를 가능하는 하는 ‘공동체’를 강조함.

이 중에 두 번째 것에 관심이 없었던 프래그머티스트도 있었음.

제임스와 듀이는 어떤 믿음이 종국적으로 결정되는가에 유의하지 않았음.


[62]

그들의 현대적 후계자인 로티는 화학 이론이 문학 이론보다 더 영속적이라고 해서, 화학이 더 나은 방법을 갖고 있다거나 참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함.


[63]

듀이는 자신의 철학을 도구주의라 이름 붙이며, 이전의 프래그머티스트의 철학과 차별지음.

도구주의자는 과학에 대한 특수한 종류의 반-실재론자

도구주의자는 이론이 현상에 관한 기술을 조직화하기 위한,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로 추론을 이끌어내는 연장 또는 연산장치라고 주장함.

도구주의자는 이론과 법칙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며, 그것들은 단지 도구이며, 글자 그대로의 언명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



  5. How do positivism and pragmatism differ?


[63-64]

실증주의와 (퍼스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다른가?

프래그머티즘은 그것의 모든 신조를 지식의 ‘과정’에 두는 헤겔적인 독트린임.

실증주의는 보는 것‘만’ 믿을 수 있다는 관념에서 생겨남.

실증주의자가 인과와 설명을 부정하는 곳에서 프래그머티스트는 (적어도 퍼스적 전통 속에서) 즐거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인과와 설명이 미래의 탐구자를 위해 유용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판명되는 한 그러함.



(2022.09.12.)

    

2022/03/21

대학통합네트워크는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 수를 늘릴 수 있는가



내가 자료를 찾다가 충북대 경제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교수 수가 너무 적어서 약간 놀랐다. 경제학과인데 교수가 여덟 명밖에 안 된다. 철학과도 아니고 어떻게 경제학과 교수가 여덟 명밖에 안 되는가? 이상하다 싶어서 충남대 경제학과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충남대 경제학과는 교수가 아홉 명이다. 강원대 경제학과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강원대 경제학과는 교수가 일곱 명이다. 전북대 경제학과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전북대는 다른 국립대보다 학생 수가 많다고 들었는데 교수는 열한 명이다. 전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열두 명이고 지역개발학전공까지 포함해도 열다섯 명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경제학과는 교수가 몇 명일까? 서른여덟 명이다.

서울대 경제학과의 교수 수가 과도하게 많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국립대 경제학과의 교수 수가 과도하게 적은 것인가? 서울 시내 사립대 경제학과와 비교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른다섯 명,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스물아홉 명,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른 명, 성균관대 경제학과/글로벌경제학과 교수는 서른두 명,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스물두 명이다.

보통은 교수 수가 학생 정원과 어느 정도 비례하기 마련일 것 같다. 그래서 경제학과 학생 수를 검색해보았는데 그건 못 찾았고, 총 재학생 수만 놓고 보면 크게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지방 국립대가 더 많다. 구글 검색에 따르면, 서울대 27,813명, 충북대 18,490명, 충남대 24,120명, 강원대 25,030명, 전북대 32,309명, 전남대 35,578명이다.

혹시 경제학과 교수가 그만큼 필요하지 않은데 내실과 상관없이 단순히 대학 평가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교수를 확보한 것은 아닌가? 다른 과를 비교해보면 된다. 서울대 철학과는 교수가 열세 명이다.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외국 대학과 비교하여 교수 수가 적으며 교수 한 명이 지도해야 할 대학원생 수가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충북대 철학과 교수는 몇 명일까? 일곱 명이다. 충남대 철학과 교수는 여덟 명, 강원대 철학과 교수는 여섯 명이다. 그나마, 전북대 철학과 교수와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각각 열 명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지방 국립대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다음 중 하나를 골라보자.

(1) 지방 국립대들의 교수 수를 늘린다.

(2) 지방 국립대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1)번이 맞는 답 같다. 배터리가 방전되었는데 직렬로 연결하나 병렬로 연결하나 뭐가 달라질 것이 있는가? 대학을 가로로 연결하든 세로로 연결하든 그래서 도대체 뭐가 좋아진다는 것인가? <가로세로연구소>인가?

<교수신문>에 따르면, 올해로 대학통합네트워크론이 나온 지 1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내가 학부를 다닐 때도 네트워크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도 그러는 것이다. 학부 때 내가 대충 읽어본 자료집에서도 실효성 없는 이야기뿐이었는데, 십몇 년이 지나도록 부르디외가 어쨌다느니, 권력이 어쨌다느니, 문화가 어쨌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나왔다. 그게 한국 대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쥐뿔이나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내가 무식해서 고상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간단명료한 설명도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 수를 어떻게 늘릴 수 있다는 것인가?

대학통합네트워크 같은 소리를 아무리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딴 네트워크가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 수를 어떻게 늘릴 수 있다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가능한 답변은, 대학통합네트워크의 원래 취지가 지방 국립대의 경쟁력 강화 관점이 아니라 서열화 해체이므로 나의 논점이 어긋났다고 하는 것이겠다. 그런 답변을 하는 사람들은 서열화와 경쟁력이 별개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할 것이다.

대학에서 받는 교육의 질이나 수준과 대학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입시에서 나타나는 대학의 서열이 무관한가? 그렇다면, 왜 대학 서열과 대학이 확보하는 자원은 비례하는가? 왜 학생 1인당 투입되는 교육비와 대학의 서열이 비례하는가? 왜 똑같은 신생 학교인데도 포항공대나 한예종 같이 돈을 때려넣어 만든 학교들은 기존의 학교들을 다 이겨먹는가? 왜 재단이 맛이 가면 학교도 같이 맛이 가는가? 아마도 문화 심취자나 이데올로기 심취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권력이 어떠니 이데올로기가 어떠니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대학통합네트워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서울대 같은 학교를 열 개 만들면 입시의 병목현상이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고작 그런 결론을 얻는 데 17년이나 걸린다니.

네트워크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교수 수부터 늘리자고 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있다고 치자.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가 늘든 말든 여전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다. 월급이 깎이지도 않을 것이고, 연구비도 깎이지 않을 것이니,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석사학위를 준 학생에게서 곧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는 연락을 받는다고 해보자. 충북대 경제학과에 자리가 생긴다. 이게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에게 좋을까, 안 좋을까? 이런 식으로 따지면,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든,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든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당연히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도 좋고, 학부생도 좋고, 대학원생도 좋다. 지방 국립대 교수 수 확충 방안을 모색한다면, 여기저기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다들 신이 나서 OECD 평균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몇 명이네, 정부 예산 중 고등교육 예산이 몇 퍼센트네, 어느 대학은 교수가 몇 명이네, 내가 유학 갔던 학교는 어땠네 하면서 지지 여론을 만들 것이다. 그런데 감 없는 아저씨들은 괜히 이상한 데 꽂혀서 네트워크 같은 소리나 하고 다녀서 경북대나 부산대 같은 국립대에서도 반발하게 만든다. 아무리 감이 없어도 그렇게까지 감이 없을 수 있나?

네트워크 같은 소리가 아저씨들의 소소한 여가 활동 정도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문제는, 정의당 같은 정당에서 그런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지난 번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예비 후보가 서울을 해체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보자. 어차피 당선 안 될 거라고 해도 그렇게 막 나갈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와중에 국공립대네트워크 같은 것도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당에 정책 생산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상한 것을 그렇게 낼름 주워 먹는가? 주워 먹더라도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는 봐가면서 주워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2022.01.21.)


[외국 가요]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Billie Holiday - I’m a fool to want you ( www.youtube.com/watch?v=qA4BXkF8Dfo ) ​ Billie Holiday - Blue Moon ( www.youtube.com/watch?v=y4b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