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1

대충 말해도 되던 시대의 종말



어느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EBS에서 중・고등학교 수준의 생물학 지식을 설명한 것을 두고 어느 교수가 “과학 커뮤니케이터분들, 헛소리 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로 시작하는 비판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를 두고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되었는데, 여러 의견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틀린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교수가 지적한 내용을 해당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알고 있었더라도 “나의 두 번째 교과서”라는 틀을 표방하는 방송이라서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이 틀렸다는 것이 논쟁거리가 된다니, 한국 사회가 많이 발전했음을 실감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은 이순신 빼고 온 나라 사람들이 태만하게 쳐놀다가 임진왜란을 때려맞은 줄 알았고, 세상이 무섭게 변하는 줄 모르고 자빠져 자다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줄 알았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당시는 많이 배웠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그런 흔해 빠진 헛소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교장들도 어디서 똥 같은 소리를 듣고 와서는 월요일 애국조회 때 훈화 말씀이랍시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학생들에게 그날 들은 훈화말씀을 ‘훈화록’에 적어야 했고, 안 적으면 혼났다.)

조선사 연구의 최신 동향을 모르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뒤통수 맞듯이 임진왜란을 맞닥뜨리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인이 할 법한 발상이 아니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자.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인생을 살고 있나? 아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는가?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현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수능을 잘 못 본 것은 언제 수능을 볼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언제 수능을 보는 줄 알았고, 현 시점으로부터 수능 볼 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았는데도 수능을 못 보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예상되는 일도 생각해 보자.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OECD 평균보다 높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가 언론에 나온다. 빈곤한 노인 중 자기가 늙을 줄 몰라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마땅한 대비책이 없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남의 일이 아니다.)

현 상황, 과거의 일, 예견되는 상황, 이렇게만 놓고 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나라가 망할 뻔했거나 망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허술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그런 허술한 소리를 의심하지도 않고 믿어버릴 수 있었을까? 신기한 일이지만, 옛날에는 그런 소리가 도시 전설처럼 도는 것이 아니라 아예 출판물로 나왔다. 1962년에 출판된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있는 「눈치로 산다」라는 글을 보자.

천민에서 상감에 이르기까지 눈치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미를 파악하는 감성이 더 발달하게 된 것이다. 바늘 끝처럼 눈치 보는 그 감각만이 예민해져 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만 해도 우리는 오직 일본의 침략 여부를 눈치로만 살피려 했다.

일본을 정탐하러 간 사신들은 반년이나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기껏 보고 온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뿐이었다. 그야말로 눈치만 보고 온 것이다.

임금 앞에서 국가의 존망을 판가름하는 그 정보를 아뢰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광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반대로 “그의 눈이 쥐새끼처럼 생겼으니 결코 쳐들어올 인물이 못 된다”고 했다.

일본 사신들은 한국에 와서 군사들이 들고 있는 창의 길이, 기생과 노는 목사, 그리고 회석에서는 후추를 던져 제각기 그것을 주우려고 덤비는 꼴에서 국가의 강기가 어지러워진 것 등을 세밀히 정탐해 갔는데, 우리의 사실들은 오직 히데요시의 눈만 가지고 왈가왈부했던 것이다. (47쪽)

오늘날 어떤 유튜버가 아무 근거 없이 이딴 소리를 하면 사학과 학부생, 사학과 대학원생, 사학과 교수가 달려들어 물고 뜯고 난리가 날 것이다. 이어령은 시대를 잘 만나서 망상 늘어놓은 것 말고 무슨 연구를 했는지 알 수 없는데도 석학 소리를 듣고 살았다.

이어령 이후에 대중적으로 석학 소리 듣는 사람 중 하나는 도올 김용옥일 것이다. 그 시절에 해외 명문대에서 학위 여러 개 받은 것은 대단한 일이고 대학교수 그만두고 한의대를 졸업한 것도 대단한 일이나, 그래서 어떤 연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석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연구서인 척하는 교양 서적을 많이 출판했기 때문일 텐데, 책의 내용 중 태반은 잡담이거나 정치 이야기인 데다(물론, 그 맛에 사람들이 읽기는 한다), “무슨 무슨 강의”, “무슨 무슨 강해”라는 제목의 책을 내지만 그 중 상당수는 강의하다 말거나 번역하다 만 것이다.(비교적 최근에야 끝까지 완성하는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쪽 서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양철학 쪽 서적 관련해서는 도올의 책이 기존 번역서나 연구서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문제 없다. 어차피 도올 김용옥의 책을 읽는 대부분은 비-전공자 아닌가?

김용옥 다음 세대에서 대중적으로 지식인 소리 들은 사람을 꼽자면, 유시민과 진중권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업은 (유시민이 자처한 것처럼) 지식소매업인가? 지식소매업을 하기는 했겠지만, 주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가수로 데뷔한 다음, 노래는 별로 안 부르고 배우가 되는 연예인처럼, 지식소매업으로 대중에게 등장했지만, 유시민에게는 정치와 정치비평이, 진중권에게는 풍자가 사실상 본업이었다. 동시대 인물 중 故 남경태 작가가 두 사람보다 지식소매업에서 훨씬 더 많은 작업을 했다.

유시민과 진중권 다음 세대에서 대중적으로 지식소매업을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고 ‘작가’나 ‘강사’로 불렸던 것 같다. 그런데 요새는 지식소매업을 하는 작가나 강사들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강신주 박사는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모르거나 모르니만 못하게 아는 것을 이용하여 철학향을 첨가한 유사-심리상담을 했으나, 이제는 아예 오은영 박사 같은 사람들이 애새끼부터 노인네까지 후두려 패며 상담하는 마당이라 예전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설민석은 “한국사 전문가”를 자처하며 대중 앞에 등장했으나, 대놓고 말만 안 했을 뿐 다들 그가 한국사 전문가가 아닐 뿐 아니라 연기 전문가도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소매업 종사자들의 일반적인 위상은 예전보다 떨어지고 있지만(석학 → 지식인 → 작가), 오히려 일반인들이 아무 노력 없이 접할 수 있는 지식의 수준과 양과 정확성은 예전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박사나 교수들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이익주 교수(고려사)는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고, 김범준 교수(사회물리학)는 구독자가 20만 명이 넘고, 김지윤 박사(미국 정치)는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는다. 학위 없는 사람들이라고 대충 하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지식은 날리지> 같은 경우는 한 달에 한두 편 올릴까 말까인데 작업하느라 목 디스크를 달고 산다고 하고, <지식한입>은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은 지 한참 되었는데도 수익에 비해 작업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니 나이 많은 사람들이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옛날이 좋았다는 말은, 정말로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지금보다 대충 해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미국의 달 착륙이 조작이라는 음모론을 믿어도 지식인 대접을 받았는데, 이제는 이공계 석사 출신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중・고등학교 교과서 내용대로 강의 영상을 찍고도 페이스북에서 관련 분야 교수에게 뒤지게 욕 먹는 세상이 되었다.

* 링크: [EBS] 보기만 해도 유식해지는 궤도의 진짜 쉬운 과학 교과서 - ‘유전’에 관련된 오해와 진실

( www.youtube.com/watch?v=G59jucduGjI )

* 참고 문헌

이어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문학사상사, 2008.

(2025.10.01.)


연구 분야나 관심 분야를 표기하는 방법

핵심어를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연구 분야나 관심 분야를 소개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하나는, 사람 만날 때마다 전공 분야가 바뀌는 준-사기꾼들이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