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있는 배수관을 파내고 새로 묻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배수관을 묻을 때는 토지 경계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묻었는데, 경계 측량을 하고 보니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농로 폭이 3m인데 배수관 길이는 4m밖에 안 되는 데다, 측량하고 보니 배수로 입구가 농로 한가운데에 있어서 농기계가 농로를 지나는 데 문제가 있었다. 기존의 배수관을 파내고 새로 배수관을 설치하기로 했다.
농로 폭이 3m인 것을 감안하면 배수관 길이는 6-7m 정도이어야 한다. 시중에 파는 PE이중관의 길이는 4m이다. 6-7m짜리 PE이중관을 주문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돈이 더 들기 때문에 4m짜리 두 개를 연결했다.
맨땅에 새로 배수관을 설치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 배수관을 제거한 뒤 2-3m만 땅을 더 파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포크레인 기사를 안 부르고 혼자서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기존 배수관을 파내는 것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이제 2-3m 정도만 새로 흙을 파내면 되니까 금방 일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땅 속에 뭐가 있었다. 농기계가 지나가도 배수관이 파손되지 않게 해야 했고, 또 배수로가 수로 쪽으로 경사지게 만들어야 해서 땅을 더 파야 했는데, 땅 속에 무언가가 잔뜩 있었다.
땅 속에 있는 것은 탄 자국이 있는 검은 물체였다. 혹시나 조선시대 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땅을 파보았다. 검은 물체는 물체 탄 PE이중관의 잔해였다. 예전에 어머니가 근처에서 불을 놓다가 잘못해서 배수관이 다 타버린 일이 있었다. 그때 타고 남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배수관을 새로 묻을 때 이왕 땅을 파내는 김에 탄 것을 다 제거했어야 했는데 왜 그런 것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타다 남은 배수관만 걷어내면 되겠지 싶었는데 땅 속에 또 뭔가가 있었다. 벽돌을 비롯한 건축 폐기물이 있었다. 폐기물을 처리하기 귀찮아서 인부들이 묻은 건가? 아크릴 조각도 나왔다. 지붕을 연장할 때 썼던 아크릴 조각이었다. 당시 배수관을 파묻은 사람은 지붕 공사와 별개였으니 땅 속에 아크릴 조각을 묻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배수관을 다시 파낼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배수관을 태워먹는 바람에 다시 땅을 파고 배수관을 묻은 것이다. 그랬으면 예전에 생각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전에 묻은 것까지 다 파냈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불에 타다 남은 이중관까지도 그냥 묻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포크레인 기사를 불렀을 테니 그냥 땅을 조금만 더 파라고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삽으로 땅을 파는 내가 개고생을 하게 되었다.
벽돌 등 건축 폐기물을 죄다 파냈다. 타다 남은 이중관 말고 땅속에서 꺼낸 벽돌만 해도 포대 몇 자루는 충분히 채울 만한 양이었다. 이제 관만 묻으면 되겠지 하고 PE이중관을 땅 속에 넣었는데 내가 원하는 위치와 약간 달랐다. 땅을 또 팠다. 한참 땅을 파니 내가 원하는 위치에 이중관을 놓을 수 있었다. 4m짜리 두 개를 이으면 8m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배수관이 너무 길어져서 1.5m 정도 잘라냈다. PE이중관은 강도가 그렇게 강하지 않기 때문에 나무 자르는 톱으로도 쉽게 자를 수 있다. 이중관을 적당한 길이로 자른 뒤 두 이중관을 놓고 연결 부위에 수밀 시트를 붙인 뒤 연결 소켓을 끼운 다음 볼트와 너트로 렌치를 꽉 조였다.
구덩이에 흙을 채우기 전에 흙덩어리로 중간중간에 끼어넣어서 이중관이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고 비교적 고운 흙을 이중관 주변에 넣었다. 그런 다음 흙을 다 때려넣었다. 배출구 쪽에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뻥 뚫린 곳에 그냥 흙을 부으면 밖으로 다 흘러나간다. 그냥 흙을 쌓으면 잘 해봐야 45도 이상 쌓이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흙을 파낼 때 생긴 흙덩어리를 이용할 수 있다. 돌담을 쌓는 것처럼 흙덩어리를 쌓은 다음 흙을 채우면 흙이 밖으로 새지 않는다.
원래는 진흙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당장 장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힘들어서 일단 그 정도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지금 보면 배수관이 너무 길게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 상황에 맞게 흙을 채워넣고 진흙으로 바르든지 잔디를 옮겨심든지 하면 아마 30cm 정도만 밖으로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 뱀발
어머니가 불을 잘못 놓아서 배수관을 태워먹었을 때 그 근처에 있던 나무까지 타버리고 말았다. 그 때 옆집 할머니가 자기 집 나무를 태웠다고 난리를 쳤는데, 알고 보니 그 나무가 있던 땅은 우리 집 소유의 땅이었다.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밭둑에 돼지감자 썩은 것을 버렸다가 돼지감자가 안 죽고 싹이 터서 결국 밭둑이 온통 돼지감자로 뒤덮인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옆집 할머니가 난리쳤었다. 도랑이 자기 집 땅인데 돼지감자가 저렇게 번지니 어떻게 할 거냐고 생난리를 부렸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랑의 절반에서 3분의 2가 우리집 땅이었다. 경계 측량을 한 다음부터는 옆집에서 짹 소리도 안 하고 있다.
(2022.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