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asdair MacIntyre (2007),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Third Editio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pp. 51-61.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제5장. 도덕을 정당화하려는 계몽주의의 기획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2021) ]
키에르케고르, 칸트, 디드로, 흄은 기독교적인 배경을 공유함.
그들 사이의 견해 차이는 나지만, 칸트, 디드로, 흄이 공유하는 구조는 거의 동일한 것
이들이 공유하는 도덕법칙에 대한 개념과 인간본성에 대한 개념에는 모순이 존재함.
두 개념의 기본 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분석했던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가능태에서 현실태가 되는 과정에 대한 학문
인간의 목적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본성이 제대로 실현될 때 가능함.
‘교육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면 가능한 인간 본성’의 개념, 그리고 두 요소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적 윤리학의 법칙’으로 이루어짐.
이러한 구조는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되어도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음.
고전적 도덕성에 대한 유신론적 해석이 지배하는 동안, 도덕적 표현은 이중적인 기준을 가짐.
도덕은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됨.
따라서 이러한 도덕적 도식에서는 참과 거짓만이 가능함.
중세인들은 이 도식이 신의 계시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성의 발견이고 합리적으로 변호될 것으로 믿었음.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과 얀센주의 가톨릭이 새로운 이성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이러한 믿음은 사라졌음.
칼뱅은 아담이 타락하면서 이성도 타락했다고 말함.
이는 17세기 과학과 철학의 토대가 됨.
이성은 본질 또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하는 과정 같은 것을 파악하지 못하며, 수학적 관계나 사실의 진리만을 알 수 있을 뿐.
이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질적 개념에서 양적(역학적) 개념으로 이행하게 함.
그래서 디드로, 스미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본성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을 배격함.
이는 도덕 도식을 두 가지 요소로 이룸.
도덕적 계율은 인간 본성을 개선하고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음.
하지만 본성에서 도덕이 나왔는데, 도덕이 다시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음.
흄은 “신과 인간본성에 대한 논의가 is, is not에서 ought ought not로 변했”으며, 이에 대한 연역적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함.
이러한 것의 의미는 ‘사실적 전제’에서 ‘도덕적 규범’을 도출된다는 것.
이에 반박하여 “논리적 진리로서 도출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함.
타당한 논증에서는 전제에 이미 함축되어 있지 않은 것은 결론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스콜라 철학적인 상투어(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에만 적용된 것
A. N. 프리미어의 반대 사례는 이 원리의 결함을 나타냄.
이것이 가능한 것은 기능적 개념인데, 이러한 전통은 사회적 삶의 형태와 관련됨.
(2021.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