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2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의의



산업부 공무원이 월성 원전 1호기 관련 문서 444개를 삭제한 사건이 있었다. 검찰 조사에서 해당 공무원은 자신이 “신 내림을 받은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신 내림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삭제한 문서가 마침 444개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찝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신 내림은 그냥 넘어가자.

해당 공무원이 관련 문서를 삭제한 것은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월성 원전 1호기를 가동 중단할 때와 대비하여 계속 가동할 때의 경제성을 일부러 낮게 평가하도록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자, 해당 공무원은 관련 문서를 임의로 삭제했다. 이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3년 전에 있었던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2017년 당시 건설 중인 신고리 원전 5・6호기를 건설 중단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공론화위원회에서 건설 중단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했고,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 공론화위원회의 결론은 건설 재개로 나왔다. 왜 그랬을까? 내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만, 관련 연구자에게 들은 바로는 대충 다음과 같다고 한다.

찬반 동수로 맞추어 층화추출방식으로 선정된 시민대표참여단은, 2박 3일 동안 건설 중단 측과 건설 재개 측의 발표를 번갈아 듣고 중간 중간에 시민들끼리 토론하며 의견을 조율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대표참여단의 의견이 점점 원전 건설 재개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건설 재개 쪽으로 기울어진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중 하나는 건설 중단 측의 전문성 부족이다. 건설재개 측에서는 원자력 관련 전문가들이 나와서 설명을 잘한 반면, 건설 중단 측에서는 환경 운동가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설명을 하거나 흔히 말하는 감성팔이 같은 것이나 했다는 것이다.

공론화위원회에서 나온 결론이 법적인 효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고, 공론화위원회 자체도 어떠한 법적인 근거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면 공론화위원회를 왜 만들었는가? 대통령이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그냥 만들어본 것이다.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니 새로 짓던 원자력발전소를 짓지 못하게 해야겠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아서 그냥 공사를 중단시키면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의 목소리를 내도록 하면,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당시 여론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공론화위원회를 하면, 설사 찬반동수로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도, 결국 건설 중단 쪽으로 결론이 도출될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의의는 그냥 시험적으로 공론화위원회라는 해보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시민들의 싸워가며 얻어낸 민주주의의 산물도 아니다. 정부가 자기들이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 유리할 줄 알고 했다가 뒤통수 맞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당시 전문가들의 평가는 나 같은 무식쟁이의 시각과는 다소 달랐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두고 숙의 민주주의가 어쨌다는 둥, 무슨 거버넌스가 어쨌다는 둥, 집단 지성이 발휘가 됐네 안 됐네, 시민 권력이 탄생했네 어쩌네, 대중들의 과학에 대한 신뢰가 어쩌고 하는, 온갖 의미를 부여했다. 신문 칼럼도 아니고 KCI 등재지에 게재된 학술논문에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함축은 어디에서 어떻게 도출되었는가? 그러한 결론이 도출될 만한 구석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누구나 접근가능한 자료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연구들은, 애초부터 입증도 안 되고 반증도 안 되게 되어있기 때문에 반론에도 취약하지 않다. 해석상의 차이라고 하거나 그런 의미가 있다고 거듭 주장하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서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우긴다면, 그에 대해 뭐라고 반박하겠는가. 그런데 가끔씩 이번 문서 삭제 사건 같은 것이 터져서 그러한 연구의 허구성이 들통나기도 한다.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에 조작 의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조작된 것이라면, 그리고 신 내림을 받아서가 아니라 윗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에 관한 온갖 의미부여는 그저 새 정부에 대한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이거나 “시민권력의 탄생” 같은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면, 월성 원전 1호기 폐쇄 같은 것도 공론화위원회 같은 데서 공개적으로 처리했겠지 왜 경제성 평가를 조작하려고 했겠는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이후에 변변한 공론화위원회가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한국 사회에 갈등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공론화위원회가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그 동안 공론화위원회가 왜 제대로 열리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애초에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을 시민을 동원하여 쉽게 처리하려고 만든 것이 공론화위원회인데 예상과는 달리 정부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니까 그 이후에는 안 만들었다는 것이다.

월성 원전 1호기 관련 문서를 왜 삭제한 것인지, 누구의 지시를 받고 했는지는 검찰이 밝히든 말든 할 거니까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여기서 내 관심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실 관계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고, 숨겨진 어떠한 함축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고, 누구라도 약간의 시간만 들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에다가 의미부여나 하는 것이 왜 연구라고 불리는가? 사춘기를 세게 겪는 청소년도 아닌데 왜 그들은 자신의 의미부여 활동을 마치 연구 활동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인가?

* 링크: [조선일보] 감사 전날 밤 원전파일 삭제...공무원, 윗선 묻자 “신 내림 받았나봐”

( www.chosun.com/national/court_law/2020/12/02/2UZ2ZHHO5VD3NGJLJU33UCJ2GQ )

(2020.12.12.)


2021/02/10

[근세철학] Mates (1986), Ch 7 “Identity in Actual World” 요약 정리 (미완성)

     

[ Benson Mates (1986), The Philosophy of Leibniz: Metaphysics and Language (Oxford University Press), pp. 122-136. ]

  

  

  1. Two Criteria

  2. Oblique Contexts

  3. The Identity of Indiscernibles

  

  

라이프니츠와 동일성 문제 [p. 122]

- 동일성 문제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핵심 중 하나

- 라이프니츠는 첫 저작인 Disputatio metaphysica de principio individui (1663)부터 이 문제를 다룸.

- 대상들이 “전체”(whole being)에 의해 개별화된다는 생각은 라이프니츠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음.

- 라이프니츠의 언어철학과 논리학은 그의 형이상학에 기반함.


[pp. 122-123]

예) 카이사르가 된다는 것은 그가 겪은 모든 일과 앞으로 그에게 일어날 모든 일의 완벽한 목록에 따라 된다는 것.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가 참이다 

->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술어에 의해 표현되는 개념이 고유명사 “카이사르”에 의해 표현되는 개념에 포함됨.



  1. Two Criteria


[p. 123]

- 기준(1): A와 B는 동일하다. ↔ A는 B이고 B는 A다.

- 기준(2): A와 B는 동일하다. ↔ 어떤 명제에서 진리치가 바뀌지 않고 A가 B로 대체될 수 있다.(salva veritate 원리, 라이프니츠의 법칙)

- 라이프니츠는 두 기준이 등가임을 증명하려 함.


[pp. 124-125]

- 기준(2)

- 문제: 이름(names)과 명명된 것(things named)의 혼동

예) 삼각형(triangle)과 삼변형(trilateral). 이름으로서는 상호 교환되지만, 명명된 것으로서는 동일할 수도 있고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음.

- 이시구로, 펠트만 등의 해석

라이프니츠는 기준(2)를 개념 하에 있는 대상들 간의 동일성 기준이 아니라 용어들(terms), 또는 (이름에 의해 표현되는) 개념들(concepts) 간의 동일성 기준으로 봄.

그러므로 이 문제는 해결됨.

- 이시구로 (1972): “동일한 두 개념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모든 명제들에서 (특정한 의도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진리값 변화 없이 대체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 이시구로의 해석에 대한 반론 [p. 125]

(1) 이시구로의 해석은 라이프니츠 원리를 공고하게 만듦.

(2) 그러한 해석에 부합하지 않는 텍스트가 너무 많음.


■ (1)과 관련 [p. 126]

- 이러한 해석은 ‘진리치가 바뀌지 않는다’는 구절을 불필요하게 만듦.

- 명제 P에서 개념 A를 개념 B로 대체한 결과 다른 P’가 된다면, 그 명제의 진리치가 무엇이든 A와 B는 다른 개념

- 명제 P에서 개념 A를 개념 B로 대체한 결과 동일한 명제라면, 진리치는 당연히 불변

⇒ 문제: 기준(2)는 사소함(명제는 개념들로 구성되었으므로) & 순환적


(2)와 관련 [pp. 126-127]

- LS IV vii C 103-4: “나는 모든 측면에서 유사한 두 개별자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왔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이 그것들 중 A라고 말할 수 있지만 B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A가 B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고 그 둘이 동일한 것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들이 다양한 술어를 가진다면, 술어에 포함된 개념들도 다를 것이다.”

- LH IV ivv B 3 24r: “실제로 구분되는 것들은 대체로 의미에 의해 구별된다;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것들은 mind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므로, 평면에서 삼각형과 삼변형은 대물적[re]으로 다르지 않고 개념적으로만 다르다. [...]”

⇒ 문제(2): 사용(use)과 언급(mention)의 혼동: “재귀적(reflexive)” 명제 내에서 두 대상이 실제로 “동일”하더라도 개념적으로는 동일한 것이 아닐 수 있음.


 

[pp. 127-128]

⇒ 문제: 이를 받아들이면,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임.

- (1) 전칭긍정명제 

“모든 삼각형은 삼변형이다”와 “모든 삼변형은 삼각형이다”가 모두 참이므로, 라이프니츠의 ‘주어에 포함된 술어 원리(Predicate-in-Subject Principle)’에 따라, 개념으로서 ‘삼각형’과 ‘삼변형’은 서로 포함하고 따라서 동일함. 

그러나 위의 해석에 따르면, 실제로 삼각형과 삼변형이 동일해도 개념적으로 다름.

- (2) 단칭존재명제 

“아담은 첫 번째 사람이다”와 “첫 번째 사람이다”는 모두 참이므로 “첫 번째 사람”이라는 개념과 “아담”이라는 완전개체개념은 동일함.

그러나 이의 해석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이라는 개념은 개체를 완전하게 결정해주지 않음.


[p. 128]

- 기준(1)의 문제: ‘주어에 포함된 술어 원리’에 따라 “A와 B는 동일하다”가 참이면, 이는 “A와 A는 동일하다”와 같은 명제가 되고, 그 결과 모든 참인 동일성 관계는 사소하게 됨.

-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A는 A다”를 기초로 기준1과 기준2가 동일함을 보이고자 함.


[p129]

라이프니츠의 “가장 강력한 공리(most powerful axiom)”

(1) “A는 B다”가 참이면, B는 어떤 다른 명제에서도 진리치 변화 없이 술어 위치에서 A로 대체될 수 있다.

(2) “A는 B다”와 “C는 A다”가 참이면, “C는 B다”가 참이다.

(3) “A는 B다”와 “B는 C다”가 참이면, “A는 C다”가 참이다. [(2)의 variables을 바꾸어 씀]

(4) “A는 B다”가 참이면, A는 어떤 다른 명제에서도 진리치 변화 없이 주어 위치에서 B로 대체될 수 있다. [(1)-(3)에서 따라 나옴]

(5) “A와 B”가 참이고 “B는 A다”가 참이면, A와 B는 어떤 명제에서도 진리치 변화 없이 (주어나 술어 위치에서) 서로 대체될 수 있다. [(1)-(4)에서 따라 나옴]



  2. Oblique Contexts


[p. 130]

라이프니츠는 동일성 기준2(salva veritate 원리)가 만족되지 않는 예외로 재귀적(reflexive)(↔직접적) 명제를 생각함



  3. The Identity of Indiscernibles


[pp. 132-133]

- 라이프니츠의 식별불가능자 동일성 원리

- salva veritate(기준2)의 일부

(1) 어떤 명제에서 진리치가 바뀌지 않고 A가 B로 대체될 수 있다 → A는 B와 동일하다 (식별불가능자 동일성 원리) - 개별 실체에만 적용 (보편적 용어들에는 적용되지 않음)

(2) A와 B는 동일하다 → 어떤 명제에서 진리치가 바뀌지 않고 A가 B로 대체될 수 있다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

- 충분이유율에 따라 자연에는 두 개체들인 식별불가능한(질적으로 동일한) 경우는 없음. 즉, 동일한 완전 개체 개념을 가진 두 실체는 없음.

- 기하학적 상황에서는 식별불가능한 대상들이 존재한다.

예) straight lines, two eggs completely similar [n shape], two impressions of the same stamp in uniform wax 등

- 그러나 모나드와 모나드 집합체가 존재하는 실제 세계에서는 (질적으로 동일하면서) 수적으로만 다른 대상들은 없다고 주장함.


[p. 135]

- 사소함의 문제와 대안

- 이 원리에서 다룰 수 있는 개념은 질(quality)의 범주에 속한 개념으로 제한됨.

외적 명칭(extrinsic denomination, 관계적 속성)은 식별가능한 두 대상을 사소하게 다른 개념 하에 두게 되므로 배제되어야 함.

예) 시저는 폼페이와 구별되므로, 시저는 “폼페이와 구별된다”는 개념 하에 놓이게 되고 폼페이는 그렇지 않음.

⇒ 식별불가능자 동일성 원리가 동일자 식별불가능성 원리와 구별되지 않음. 즉, 비교되는 대상들 간의 동일성 여부가 결정된 상태에서 식별불가능자 동일성 원리에 적용하는 것이 됨.

- 대안: 이 원리에서 서로 대체되는 것 ≠ 동일성 여부가 결정된 것



(2017.06.08.)

     

2021/02/09

존재론 같은 소리



철학하고 별 상관도 없는데 철학 같은 소리를 하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보이는 글이 있다. 자기 분야에서 할 만큼 한 다음에 이게 그 분야의 문제인지 철학적인 문제인지 경계선상에 있는 문제가 남아서 철학을 언급한 것인가? 그런 내용은 해당 분야의 전공자나 볼까 말까한 논문에서나 가끔 나온다. 철학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글인데 철학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면, 그건 개소리 해놓고 안 한 척 하려고 그러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마치, 길바닥에 똥 싸놓고 낙엽으로 덮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그런 글에서는 뻑 하면 존재론이 어떠니, 인식론이 어떠니, 형이상학이 어떠니 하는데, 막상 읽어보면 그런 것들하고 하나도 관련이 없다. 그런 글에서는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왜 그러겠는가? 글을 쓰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 있다 싶으면 존재론, 뭔가 알듯 말듯 하면 인식론, 뭐가 뭔지 모르겠으면 형이상학,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을 두고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그냥 개소리하는 것뿐이다. 존재론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들은 내가 짬짜면이라도 시키면 중첩 상태라고 할 것이다.

연구실 옆자리에 있는 동료 대학원생이 물었다. “아니, 도대체 폭력의 존재론이 도대체 뭐예요?” 폭력의 존재론이라니, 동료 대학원생이 어디서 미친 소리를 들었나보다. 나는 그런 말을 오늘 처음 들었고 당연히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말일지 느낌이 왔다. 남자의 육감이랄까. 나는 그 단어를 설명하는 대신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읊었다.

“나 깡패 아니다. 나도 적금 붓고 보험 들고 살고 있다. [...]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 임마 그 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





그딴 게 쥐뿔이나 무슨 존재론이겠는가? 철학 논문도 아닌데 존재론 같은 소리를 하는 글을 보면, 곽철용의 대사 같은 거 대충 써놓고 존재론이라고 우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아무데나 존재론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이 멀쩡한 글을 쓴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2020.12.09.)


[외국 가요]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Billie Holiday - I’m a fool to want you ( www.youtube.com/watch?v=qA4BXkF8Dfo ) ​ Billie Holiday - Blue Moon ( www.youtube.com/watch?v=y4bZ...